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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09 : 고려의 역사 77 (제6대 성종실록 11) 본문
한국의 역사 309 : 고려의 역사 77 (제6대 성종실록 11)
제6대 성종실록
(960~997, 재위 981년 7월~997년 10월, 16년 3개월)
5. 성종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논리로 80만 거란군을 물리친 서희와 강동 6주(계속)
성종은 소손녕의 면대 요청에 응하기로 하고 서희를 적진에 보냈다. 국서를 가지고 서희가 자신의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뜰에서 절을 하라고 말했다. 이에 서희는 "뜰에서 절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만 있는 일일 뿐 양국의 대신끼리 대면하는 좌석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소손녕은 끈질기게 뜰에서 자신에게 절을 할 것을 요구 했다. 그렇지만 그의 요구를 들어줄 서희가 아니었다. 서희이 의같은 당당함에 감복한 소손녕은 결국 당상에서 대등하게 대면하는 예식절차를 승낙하게 되고, 비로소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서희와 마주앉은 소손녕이 먼저 두 가지 요구를 하였다. 첯째는 고구려의 엣땅은 거란에 속한 것이니 내놓으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요나라를 섬기지 않고 왜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느냐는 것으로 그것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이에 서희는 고려는 국호로 이미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으며, 또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국도로 정하고 있음을 내세우면서 고구려의 옛땅이 거란의 영토라는 주장에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오하려 거란이 동경으로 삼고 있는 요양이 고구려의 땅이므로 고려에 복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거란과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못한 것은 가란과 고려 사이에 여진이 있기 때문에 거란을 왕래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실정이라고 해명했다. 그래서 거란과 고려가 통교하기 위해서는 외교를 방해하는 여진을 쳐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여진이 머무르는 지역에 성을 구축하고 길을 통할 수 있도록 거란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서희의 이러한 강변이 먹혀들었다. 소손녕은 서희의 논리를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자신의 왕에게 보고하여 고려와의 화의를 승낙받음으로써 일단 거란과 고려의 전쟁은 종결된다.
소손녕과 담판에서 화의를 얻어내고 압록강 동쪽 지역의 여진족을 소멸하는 일에 거란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후 서희는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왕에게 소손녕과 대면 결과를 보고하자 성종은 즉시 시중 박양유를 예폐사로 삼아 거란에 파송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서희는 성급하게 사신을 보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역설하며 이렇게 말했다.
" 제가 소손녕과 약속하였던바, 여진을 소탕하고 옛땅을 회복한 연후에 국교를 통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종은 오렛동안 왕래가 없으면 또다시 거란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며 서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희와 성종의 외교에 대한 관점 차이를 뚜렷하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희는 거란과 대등한 힘을 형성한 다음 외교관계를 성립시켜도 늦지 않다는 실리적인 면에 치중하였으나 성종은 무엇보다 전쟁의 위협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화의가 우선이라며 정치적 안정을 먼저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손녕과 담판 이후 거란과 화의가 성립되었고, 서희는 이듬해부터 압록강 동쪽 장흥진, 귀화진, 곽주, 구주 등에 강동 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구축하여 여진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고려는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뻗어가는 기반이 되었다.
이후 서희는 종1품 태보내사령에 임명되었으나, 996년 성종 15년에 결국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요양하여야 했다. 서희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근무할 입장이 되지 못하자 성종은 그에게 치사령(퇴직령)을 내려 쉬도록 하였다.
요양을 하고 있던 서희는 성종이 죽고 난 뒤 목종 원년 998년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며, 현종 18년에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덕종 2년에 태사 벼슬이 추증되었다.
그에게는 아들 눌과 서자 주행이 있었다. 서눌 역시 벼슬에 올라 재상을 지냈으며, 그의 딸은 현종의 왕비가 되었다.
강동 6주
강동 육주(江東六州)는 993년(고려 성종 12년) 요나라의 제1차 침입 때 서희가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얻은 고려 서북면의 영토이며, 군사상·교통상의 요지였던 이곳은 여진족이 거주하여 고려의 북방 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 땅은 압록강 동쪽 280여 리, 곧 홍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며, 이 강동 육주의 북쪽 국경에 쌓은 장성이 고려의 천리장성이다.
고려는 요나라(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담판하여 요나라과 통교할 것을 조건으로 요나라로부터 얻은 강동에서 여진족을 몰아낸 뒤 994년 장흥진(長興鎭, 태천), 귀화진(歸化鎭, 위치 미상), 귀주(구주), 곽주에 성을 쌓았고, 995년 다시 안의진(安義鎭, 안주), 흥화진에, 996년에는 선주(宣州, 선천)·맹주(孟州, 맹산)에 성을 쌓고, 요나라에 적의를 보였다.
그런데 그 뒤에도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이어가며 요나라와 교류하지 않자 요나라는 불만을 가졌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0년 요나라 성종(聖宗)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때 요나라 군대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자 퇴로가 끊길 수도 있음을 염려한 요나라 군대는 고려와 강화하고 퇴각하였다.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다가 1018년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개경 부근까지 진입한 요나라 군대는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도중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귀주에서 거의 전멸하였는데, 이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을 접하게 된다. 고려는 보주를 제외한 압록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 받고 사대를 조건으로 화친을 맺었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으려고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게 된다. 사실상 고려 북진정책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북진 전진 기지인 서경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어, 훗날 '묘청의 난'과 고구려 부흥운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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