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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07: 고려의 역사 75 (제6대 성종실록 9) 본문
한국의 역사 307 : 고려의 역사 75 (제6대 성종실록 9)
제6대 성종실록
(960~997, 재위 981년 7월~997년 10월, 16년 3개월)
5. 성종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유교개혁론자 최승로와 '시무 28조'(계속)
983년 정2품 문하시랑평장에 임명된 최승로는 성종의 유교 정치이념을 제조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지방행정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중앙관제를 3성 6부제로 전환하는 등 성종대 중앙집권화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는 한편, 개혁 세력의 선두에서 고려를 양반 귀족 중심의 안정돤 국가로 이끌자고 했다.
최승로의 과감한 개혁론은 교육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고려 사회는 이미 광종 대에 과거제가 도입되어 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긴 했으나 성종 즉위 때까지도 귀족들은 유학에 그다지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최승로는 이러한 현상을 교육제도의 미비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유교사상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꿈꾸던 성종과 유교사회로 가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던 최승로의 만남 이후 고려 사회는 다시 한 번 변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교육개혁을변혁의 제1과제로 삼은 성종과 최승로는 중앙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 학교를 설치하는 한편 전국 12목에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대대적인 유학 열풍을 일으켰다.
개혁 과정에서 최승로는 988년에 종1품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청하후에 봉작되어 식읍 7백 호를 받기도 했다. 이 때 최승로는 환갑을 넘긴 노쇠한 몸이었고, 그 때문에 여러 차례 치사(벼슬살이를 중단하는 것, 퇴직)를 청했지만 성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혁의 선봉에 서 있던 최승로에게 결코 치사를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최승로는 더 이상 연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가 죽자 성종은 몹시 슬퍼하며 교서를 내려 그의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태사 벼슬을 추증했다. 또한 베 1천 필, 밀가루 3백 석, 입쌀 5백 석, 유향 1백 냥, 뇌원차 2백 각, 대차 10근을 부의로 내렸다.
성종의 이와 같은 특별한 배려를 통해서 성종시대 최승로의 정치적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엿볼 수 있다. 개혁을 이끌되 성급하지 않았으며, 중앙집권화를 꾀하되 결코 귀족 세력을 무시하지 않았고, 귀족사회를 이끌어내면서도 서민들의 삶을 간과하지 않는 중용의 덕을 갖춘 인물인 최승로가 없었다면 성종대의 과감한 개혁정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승로에게는 아들 숙이 있었으며, 최숙에게는 아들 제안이 있었다. 최제안은 현종, 덕종, 정종, 문종 등 4대 왕들을 섬기며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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