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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05 : 고려의 역사 73 (제6대 성종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305 : 고려의 역사 73 (제6대 성종실록 7)
제6대 성종실록
(960~997, 재위 981년 7월~997년 10월, 16년 3개월)
4. 유학의 진흥과 교육개혁을 통한 중앙집권화
성종은 집권 초부터 노골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감행한다. 즉위년에 팔관회의 잡기들이 번잡하다고 지적하면서 이의 폐지를 명령하고, 연등회도 폐지한다. 반면에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대대적인 유학 풍토를 조성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유교사회 건설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꾀하려는 성종의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태조는 고려 건국과 더불어 숭불정책을 실시하면서 불교를 국교로 지정한 바 있다. 또한 '훈요십조'를 통해서 연등화와 팔관회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백성의 안위로 도모하고 정서적 풍요를 누릴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이같은 태조의 당부보다는 중앙집권적 체제 완성이라는 대명제를 앞세워 과감하게 유학진흥책으로 일관한다.
숭유정책이 강화되면서 불교에 대한 압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월령(예기)의 규범에 따라 5월(중하)과 11월(중동)에 불교행사를 피하도록 명령하는가 하면 , 유교적 예제에 따라 태조를 원구(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설치하는 제단)에 배향하고 중국 3황 중의 하나인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내며 사직의 신위를 거기에 함께 모시도록 하였다.
성종의 유교사상에 따른 조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유교 윤리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효이며, 이의 연장이 곧 충이라는 경전의 내용을 기본으로 성종은 대대적인 충효사상 고취작업에 돌입했다.
성종 9년 990년에 왕이 내린 교서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먼저 근본을 알아야 한다. 근본을 알기 위해서는 효도가 제일이니, 효도는 3황 5제의 기본사업으로서 만사의 강령이요 모든 선의 주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 황제는 양인(중국 북위 때의 효자)이 자기 부모를 소중히 여긴것을 기특히 여겨 그 집과 마을에 정문(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세운 문)을 세워 그의 효성을 표창하였고, 진나라 황제는 왕상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는 뜻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기록하도록 명령했다.
(중략) 근일에 사절들을 육도에 파견하여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이별하는 것을 구제하고 홀아비와 고아들의 곤궁함을 돌보아주며, 효행을 행하는 아들과 기특한 손자, 의로운 남편, 절개 지킨 부녀들을 조사하라고 하였던 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사실이 나타났다."
이렇게 전개된 성종의 교서는 전국 각도에 효행을 행한 사람들을 찿아내어 표창하도록 명령하고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아 아, 임금은 만백성의 우두머리요, 만백성은 임금의 심복이다. 백성들이 착한일을 하면 그것이 곧 짐의 복이요, 악한 일을 하면 그곳은 곧 짐의 근심이다. 부모 공양을 잘하는 자를 높여줌으로써 풍속을 아름답게 하고자 한다. 시골의 우매한 백성까지도 꾸준히 효도에 열성을 다하는데, 하물며 벼술하는 신하들이야 자기 조상을 받드는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있겠는가. 능히 자기 집에서 효자가 된다면 반드시 국가의 충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관리와 평민들은 짐의 말을 명심하라."
성종의 교서는 효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충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곧 효사상을 고취시켜 충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이며, 결과적으로 유교사상을 통하여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을 꾀하고 있다.
유교를 통한 중앙집권 체제 확립에 대한 성종의 집념은 교육정책에서도 두드러진다.
목을 설치하면서 주목과 함께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하고,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는 한편 전국에 학교 설립을 추진한다. 향교의 전통도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고려 향교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 향교의 전통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국자감의 교과는 주역, 상서, 주례, 예기, 효경, 논어 등이었으며, 지방 학교에서는 경학과목을 비롯하여 의학, 지리, 율서, 신학 등의 잡학을 함께 가르쳤다. 이는 과거 과목과도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자감과 지방 학교는 당시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교과목을 편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과거 이후 임용된 관리들이 학문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성종은 또 다른 장치를 마련한다. 50세 이하의 휴직을 하지 않는 중앙관료는 매월 한림원에서 문제를 받아 시 3편, 부 1편씩을 제출하도록 했고, 지방관료는 매년 시 30편, 부 1편씩을 지어 제출하도록 했던 것이다.
성종은 이처럼 충효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유학을 교육정책과 연계시키고 그것을다시 관리 등용문인 과거제와 관료들에게 대입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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