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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08 : 고려의 역사 76 (제6대 성종실록 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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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08 : 고려의 역사 76 (제6대 성종실록 10)

두바퀴인생 2011. 7. 24. 03:42

 

 

 

한국의 역사 308 : 고려의 역사 76 (제6대 성종실록 10)

 

 

제6대 성종실록

(960~997, 재위 981년 7월~997년 10월, 16년 3개월)

 

5. 성종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논리로 80만 거란군을 물리친 서희와 강동 6주

서희는 광종 대에 대관 내의령을 진내 서필의 아들이다. 서필은 광종의 귀화인 중용 정책에 반대했던 인물로 사치를 싫어하고스스로 검소하여 몇 번에 걸쳐 왕의 사치를 경계하는 간언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광종이 귀화인들에게 지나친 대접을 하며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주자 이에 반발하여 스스로 자기 집을 내놓겠다고 하여 광종의 잘못된 행각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서희는 943년 대쪽 재상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이천이고 아명은 연윤이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곧고 머리가 뛰어났던 그는 광종 11년에 18세로 갑과에 급제한 후 광평 원외랑 등을 지내며 승진을 거듭하였다.

 

972년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10여 년간 단절되었던 송과의 외교관계를 회복시키면서 처음으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 때 송의 태조는 서희의 절도 있는 행동과 예법을 높이 평가하면서 검교병부상서 벼슬을 내렸다.

 

송나라에서 돌아온 후 서희는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좌승을 거쳐 983년에 정3품 병관어사에 올랐다. 그리고 993년 그가 정2품 내의시랑에 있을 때 거란이 침입하자 중군사에 임명되어 시중 박양유와 문하시랑 최량과 함께 북계(지금의 평안북도)로 진출하여 방어전략을 세웠다.

 

당시 거란은 요를 세우고 막강한 힘을 형성하여 중원을 압박하는 동시에 교려와 여진에도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거란과 외교를 단절하고 송과 접촉하였고, 거란은 이에 불만을 품고 동경 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여 왔다. 이에 고려는 응징을 결의하고 성종이 직접 서경에서 진을 쳤고, 서희 등이 북계를 수비하였다.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소손녕은 일시에 봉산군을 격파하였으며, 많은 고려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고려 조정에 서한을 보내 항복을 종용하였다. 소손녕은 자신들이 이미 발해를 멸망시켜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고려가 고구려의 일부를 차지했기에 자신들은 영토를 되찿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서희가 이 서한을 접하고 화의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성종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타진했다. 하지만 소손녕은 고려가 항복하면 화의에 응하겠다고 답한다.

 

소손녕은 80만 거란군이 도착했음을 알리면서 노골적으로 힘을 과시했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에선 항복하고 서경 이북 땅을 거란에게 넘겨주고 황주에서 절령까지를 국경으로 하자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성종 역시 이 의견을 받아들일 마음으로 서경 창고에 있던 쌀을 모두 내어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에도 쌀이 남아 돌자 그것이 적들에게 쓰일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서희는 대세를 따르지 않았다. 서희는 넉넉한 식량을 바탕으로 적과 싸운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의 약점을 잘 알고 움직이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갑자기 쌀을 버리라고 하십니까? 양식이란 백성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으로서 비록 적에게 이용된다고 하더라도 헛되이 강물에 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서희의 강력한 반대로 쌀을 대동강에 버리라는명령은 거둬졌다. 그러자 서희는 다시 고구려의 옛땅을 내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이지백이 서희의 의견을 지지하며 서경 이북의 땅을 적에게 내주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희와 이지백의 간언으로 가까스로 서경 이북땅을 내주자는 할지론은 수그러들었다.

 

이 때 소손녕의 군대는 다시 안융진을 공격하였다. 소손녕의 서한에 대해 고려가 오렛동안 답변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조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량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위력을 과시하고자 안융진을 공격했던 거란군이 패배하자 소손녕은 더 이상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항복을 종용하는 서한을 보내 고려에 면대를 요청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