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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13 : 고려의 역사 81 (제8대 현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313 : 고려의 역사 81 (제8대 현종실록 1)
제8대 현종
현종(顯宗, 991년~1031년)은 고려 제8대 국왕(재위: 1009년~1031년)이다.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 시호는 현종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顯宗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태조의 아들 안종(安宗)과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아들이다.
생애
981년 경종이 사망하면서 그의 제4비인 헌정왕후 황보씨(대종의 딸)는 궁에서 나와 살았다. 이때 그 이웃에 왕욱(王郁, 태조의 아들, 헌정왕후의 숙부)이 살았는데,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다보니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 정을 통해 헌정왕후는 왕욱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992년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는 곧바로 죽었다. 이 아이가 왕순(현종)이다.
후일 왕순은 성종의 명에 의해 보모에게 맡겨졌다. 어느날 성종의 명으로 왕순이 궁에 들어와 성종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때 왕순이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오며 '아비, 아비'라고 불렀다. 이때 성종은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아버지 왕욱에게 보냈다. 왕순은 아버지 왕욱이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 사수현(泗水縣, 현 사천시)에서 함께 살았고, 왕욱이 사망한 이듬해인 997년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현종은 12세 때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천추태후(千秋太后)가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그를 숭교사(崇敎寺)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 이후 숭교사에 자객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에 신혈사(神穴寺, 현재 서울 진관사)로 거처를 옮겨갔다. 여러 차례 김치양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자 신혈사의 주지승인 진관대사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땅굴을 파 그를 그 곳에 대피 시킨 뒤 그 위에 침대를 배치하는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1009년(목종 12년) 서북면순검사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하고 옹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다음해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자 강조에게 30만 군대로 방어하게 했으나 강조가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나주로 지채문의 호종을 받아 피난갔다가 환도했다. 이 때의 피난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록된다.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그에게 활을 쏘았으며 나중에 공주를 나오면서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때에 공주에서 머물다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어 나중에 그의 딸들이 왕후가 된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는 실질적으로 고려의 중앙정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였으며 각처의 장수들에 의해서 거란을 물리치게 된다.
1014년 11월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된 궁궐을 수축하고 거란과의 전쟁으로 크게 불어난 재정을 보전하기 위하여 무신과 군인들의 영업전을 빼앗았다. 이에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이 높았던 상장군 최질, 김훈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 정책을 실행한 문신들을 잡아 대궐로 난입하여 현종앞에서 이들에게 매질을 하고는 거란과의 전공이 높은데도 상을 받기는커녕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신도 공이 높으면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현종은 일단 수락하였다.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면서 잔치를 열어 고위 무신들을 불렀다. 잔치가 무르익어 무신들이 술에 취하게 되자 이들을 주살했다.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문치가 확고해졌다. 요사에 따르면 거란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3차 침공에 대한 주장이 거란 조정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1018년 거란이 현종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姜邯贊)이 구주(龜州)에서 거란군을 대파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1022년 향리의 장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戶長),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간소화시키고,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部) 35방(坊) 314리(里)로 정했다. 또한 그동안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으며, 최초로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선례를 만들었다.
경제 정책으로는 농상(農桑)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감목양마법(監牧養馬法)을 제정했으며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을 실시했다.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宣陵)이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가계
- 부 : 안종(安宗), 태조의 아들, 신성왕후 김씨 소생
- 모 :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王后 皇甫氏), 대종 왕욱의 딸로 경종의 왕비.
- 원정왕후 김씨(元貞王后) : 성종의 딸
- 원화왕후 최씨(元和王后) : 성종의 딸
- 효정공주(孝靜公主)
- 천수전주(天壽殿主)
- 원성왕후 김씨(元成王后) : 김은부의 딸이며 이허겸의 외손녀.
- 연경군(延慶君) : 고려 제 9대 국왕 덕종
- 평양군(平壤君) : 고려 제 10대 국왕 정종
- 인평왕후(仁平王后) - 문종의 제 1비.
- 경숙공주(景肅公主)
- 원혜왕후 김씨(元惠王后) : 김은부의 딸이며 이허겸의 외손녀.
- 낙랑군(樂浪君) : 고려 제 11대 국왕 문종
- 평양공(平壤公) - 순종의 비인 정의왕후의 아버지.
- 효사왕후(孝思王后) - 덕종의 제 3비.
- 원용왕후 유씨(元容王后) : 모후 헌정왕후의 조카이자 경장태자의 딸
- 원목왕후 서씨(元穆王后) : 서희의 손녀
- 원평왕후 김씨(元平王后) : 김은부의 딸이며 이허겸의 외손녀.
- 효경공주(孝敬公主)
- 원순숙비 김씨(元順淑妃)-평장사 김인위의 딸
- 경성왕후(敬成王后) - 덕종의 제 1비.
- 원질귀비 왕씨(元質貴妃) - 왕가도의 딸. 덕종의 비인 경목현비의 언니.
- 귀비 유씨(貴妃)
- 궁인 한씨(宮人)
- 검교태사(檢校太師) 왕충(王忠)
- 궁인 이씨(宮人)
- 궁인 박씨(宮人)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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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현종실록
(992~1031, 재위 1009년 2월~1031년 5월, 22년 3개월)
1. 불륜의 씨앗 왕순의 파란만장한 삶과 즉위 과정
경종 이후 고려 왕실은 왕위를 계승할 왕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경종이 죽을 당시 아들이 겨우 두 살밖에 안된 젖먹이였기 때문에 사촌동생 성종에게 왕위를 불려주어야 했다. 그런데 성종은 딸 둘만 얻었을 뿐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별수 없이 경종의 아들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목종은 단 한 명의 자식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왕족 중에서 근친을 통해 아들을 낳은 사람은 안종 왕욱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와 불륜관계에서 얻은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승계할 왕자가 없는 상황이 되자 불륜의 씨앗인 왕순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왕순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태조의 제4비인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대종 왕욱의 딸이며, 아버지 안종 왕욱은 태조의 제5비인 신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따라서 안종은 헌정왕후의 삼촌이 된다. 그리고 헌정왕후는 성종과 남매지간이기도 했다.
헌정왕후는 경종과 사별한 뒤 사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사가는 왕륜사 남쪽에 있었고 그 근처에 왕욱의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왕래하였고, 마침내 서로 연정을 품게 되었으며 얼마후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
이 사실은 한동안 집안에서 비밀로 부쳐지다가 마침내 성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성종은 헌정왕후의 잉태 사실을 확인한 후 즉시 왕욱을 귀양보냈다.
왕욱이 귀양지로 떠나던 992년 7월 임진일 헌정왕후는 비로소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산고로 그녀는 아이를 낳고는 죽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왕순이다.
비록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였지만, 왕순은 태조의 손자이자 성종 자신의 사촌동생이었다. 성종은 왕순을 불쌍하게 여겨 유모를 선택하여 궁중에서 그를 길렀다.
유모는 아이에게 항상 아버지라는 단어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성종이 찿아왔을 때 아이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무릎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 광경을 보고 성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를 아버지에게 데려다 줄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왕순이 두 살 때 일이다. 이후 순은 귀양지에 있는 아버지 왕욱에게 보내진다. 하지만 996년 왕욱이 병으로 죽자 순은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다섯 살에 고아 신세가 된 순은 이듬해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이 해에 성종이 죽고 목종이 들어서면서 왕순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된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모후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고, 왕권은 일순간에 그녀의 손에 넘어간다. 왕권을 장악한 그녀는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는, 목종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러자니 자연히 유일하게 왕위 계승권을 가진 동생의 아들 왕순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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