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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59 : 고려의 역사 127 (제17대 인종실록 6) 본문
한국의 역사 359 : 고려의 역사 127 (제17대 인종실록 6)
제17대 인종실록
(1109~1146년, 재위 1122년 4월~1146년 2월, 23년 10개월)
3. 이자겸의 난과 고려 조정의 혼란(계속)
척준경은 화공을 펴기로 작정하고 동화문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러자 바람에 불꽃이 날려 삽시간에 내침까지 불길이 번졌고, 궁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궁성 병사들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불길은 밤까지 계속 타올랐고, 궁선 내 병사들은 불길과 연기를 피해 밖으로 밀려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척준경은 궁성을 빠져나오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하고 수하들로 하여금 각 성문을 지키게 하였다.
척준경의 화공으로 패색이 짙이 확연해지자 궁성 병력을 이끌고 있던 오탁은 인종을 호위하여 서문으로 빠져 나가고, 나머지 병력은 밀어닥치는 척준경의 병력과 싸우다가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또한 인종을 인도하던 오탁도 척준경의 수하 낭장 장성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최탁, 권수, 고석 등의 장수들도 모두 척준경이 보낸 병사들에 의해 주김을 당하고, 궁성 병력에 가담한 대장군 윤성, 장군 박영, 좌복야 홍관 등도 살해되었다.
척준경에 의해 궁성 병력이 모두 제압되었을 때 궁권 내부는 완전히 전쟁터 같았다. 대부분은 불타 없어지고, 산호정, 상춘정, 상화정과 같은 정자들과 제석원 행랑 수십 칸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사태가 종결되자 이자겸은 궁성 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을 모두 처단하고, 그 가족이나 친척들도 죽이거나 유배시켰다. 이에 인종은 이자겸이 자신까지도 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이자겸은 대간과 조정 대신들의 공론이 두려워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그의 재종형 이수가 이자겸을 꾸짖으며 신하로서 그같은 왕의 조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호통을 치자 재위에 대한 욕심을 되삼켰다.
하지만 이자겸은 왕과 같은 권한으로 행동하면서, 인종을 자신의 사택인 중흥택 서원에 연금해버리고 모든 정사를 자신이 주관하며 결재했다.
그러나 인종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이자겸을 축출하기 위해 내의원 최사진과 모의하고 척준경과 이자겸을 이간질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척준경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린다.
"오직 나의 불찰로 흉악한 자들이 일을 저지르도록 방치함으로써 대신들에게 근심과 수고를 끼쳤다. 이것은 모두 나의 죄이다. 이제부터 스스로를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신민들과 함께 교회를 새롭게 할 것을 맹세하노라. 그대는 더욱 수신에 힘쓰고 기왕의 일은 다시 생각하지 말 것이며, 성심껏 나를 보좌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라."
은근히 자신의 모든 잘못을 인정하면서 척준경의 행위에 대해 모두 잊고 이제는 나를 위해 무언가 해보라는 달램과 권유, 협박성 조서였다.
이에 척준경은 은근히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다. 그는 원래부터 무장으로 여진 정벌시부터 윤관의 목숨을 여러차례 구한 용장이며 무골기질이 강한 충성스런 장수였다. 그래서 그는 장수로써 인종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많은 생각에 빠졌다. 마침 그 당시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집사가 척준경의 집사와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로 세도를 달리던 가문의 집사들이라 기고만장하여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상태였고, 양가 집사들까지도 한참 권세를 부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시비가 붙어 서로 싸움을 벌인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상전들이 하는 모양을 듣고 보고하여 잘 알기에 상전을 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지언의 집사가 홧김에 말했다.
"너희 상전은 임금이 있는 자리에 대고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질렀으니 그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이고, 너도 마땅히 관노로 끌려가야 될 터인데 감히 네 눔이 나를 욕해?"
이 말은 곧바로 척준경의 귀에 들어갔고, 척준경은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가서 따지며 의관을 벗어 던지고 화를 냈다. 그러자 난처한 입장이 된 이자겸은 이지미와 이공의를 불러 척준경에게 보내 화해를 요청했다. 그러나 척준경은 욕지거리를 쏟아놓으며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했다.
인종이 이 소문을 듣고 다시 지추밀원사 김부의를 그에게 보내 속희 제 위치로 돌아가 일을 보라고 권유하며 안장을 끼운 말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하려면 이자겸을 제거하는 것이 순서라고 설득하는 인종의 전언을 전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인종은 복구된 연경궁으로 옮겨갔고, 이자겸도 연경궁 남쪽에 거처를 마련하여 지내면서 북편 담장을 헐어 궁궐과 바로 통하도록 하였다. 또한 군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가져다가 자신의 집에 두었다.
그는 당시 도참설에 유래된 파자점을 믿고 있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십팔자가 왕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성씨인 이(李)자를 분해하면 십팔자(十八字)가 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독이 든 떡을 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떡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의 넷째 딸인 왕비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은밀히 떡 속에 독이 들어 있음을 왕에게 알렸고, 인종은 그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까마귀에게 떡을 던져주었더니 까마귀가 그 떡을 먹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자겸은 또 독약을 보내 왕비더러 왕에게 먹이라고 했는데, 왕비가 그릇을 들고 가다가 고의로 넘어져서 독약을 엎질러 버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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