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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7 : 고려의 역사 135 (제18대 의종실록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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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7 : 고려의 역사 135 (제18대 의종실록 2)

두바퀴인생 2011. 9. 21. 03:34

 

 

한국의 역사 367 : 고려의 역사 135 (제18대 의종실록 2)

 

 

제18대 의종실록

(1127~1173년, 재위 1146년 2월~1170년 9월, 24년 7개월)

 

1. 향략주의자 의종의 환관정치와 정중부의 난(계속)

이처럼 의종이 정사를 등한시하는 가운데 1147년에는 서경에서 이;숙, 유혁, 숭황 등이 금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려다가 발각되어 사형되었고, 이듬해 10월엔 이심, 지지용 등이 송나라 사람 장철과 공모하여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반란을 계확하다가 송나라 도강 임대유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사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역 사건이 이어지자 대간들은 일제히 왕이 방만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소요가 잇따르고 있다면서 왕 측근에서 방만한 생활을 부추기는 환관 및 내시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의종이 대간들의 요구를 쉽사리 수용하지 않자 문신들이 합문 밖에서 사흘 동안 무릎을 끓고 버티었다. 이 같은 문신들의 강한 요구에 밀린 의종은 별 수 없이 1148년 3월에 내시 김거공, 환관 지숙 등 7명을 유배시켰다.

 

그러나 의종은 다시금 근위 세력을 형성하여 금존중과 정서를 측근으로 삼고 1151년 자신의 행동을 철저하게 규제하며 대관들의 상소를 주도하던 추밀원 지주사 정습명을 삭탈관직하여 유배시켜버린다. 이 사건 이후 문신들의 기세가 위축되자 의종은 조회시에 조정에서 직접 간관들이 간언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문신들은 그냥 두지 않겟다는 결의에 찬 반격작전이었다. 또한 정습명을 제거하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김존중을 우승선으로 지위를 격상시켜 근위 세력에게 힘을 더해준다.

 

왕의 절대적 신임으로 권좌에 오른 김존중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정서가 대령후 왕경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환관 정함과 공모하여 좌간의 왕식과 기거주 이원응으로 하여금 정서를 비롯한 그 주변 인물들을 역모죄로 고변케 한다. 이 때문에 정서는 동래로 유배되고, 의종에게 항상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던 대령후 양경도 이 사건과 관련되어 1157년에 천안부로 유배된다.

 

정서의 역모사건으로 대령후를 궁지로 몰아넣은 공을 인정하여 의종은 환관 정함에게 합문지후의 벼슬을 내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한 번 대간들과 간관들이 모두 합문 밖에서 정좌하여 사흘 동안 정함의 합문지후를 제수할 수 없다며 취소할 것을 간언하였다. 환관에게 문관직인 합분지후를 내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종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중서문하성 관원들이 모두 단합하여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종은 격구를 즐기면서 개의치 않다가 며칠 후에 관원들을 호출하여 정함을 삭직시켰다고 말하여 겨우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 후 다시 문관들의 힘에 밀려 의종의 측근들이 대거 축출되고, 문관들의 반대로 왕의 격구 관람도 금지되자 환관 이균이 대궐 동쪽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의종은 점쟁이 영의를 불러 이균의 명복을 빌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영의의 건의에 따라 명인전에서 72성인에게 기도를 하고 옥황상제, 태일 및 16신에게도 기도를 올려 액운이 사라질 것을 빌었다. 또한 내전에도 삼계(三界)에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한 번 문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신을 주장하는 영의와 내시 14명, 다방 관원 5명을 축출할 것을 간언하였다. 의종은 문신들의 결사적인 간언에 빌려 다시금 영의를 제외한 측근들을 궁궐에서 내쳐야 했다. 또한 그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김존중이 등창으로 죽음에 따라 커다란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자신의 측근들을 대거 잃은 의종은 가까운 문인들을 바탕으로 다시 근위 세력을 형성하는 한편 내관들의 힘을 키워 어사대와 대간들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그런 가운데 문인 세력을 이끌고 있던 시중 임원후가 병사하였고, 그 틈을 이용하여 의종은 모후 공예왕후를 보제사로 옮기게 한 후 위협적인 존재인 아우 왕경을 천안부로 유배시키는 데 성공한다.

 

또한 그는 격구를 포기한 대신 이복기, 임종식, 한뢰 등의 문신들과 가까이 하며 주연을 베풀어 시를 짓고 노는 일이 잦아졌다. 이들 측근들의 힘을 바탕으로 의종은 대궐 동쪽에 별궁을 짓고. 시중 왕충의 저택을 안창궁, 참지정사 김전순의 저택을 정화궁, 평장사 유필의 저택을 연창궁, 추밀원부사 김거공의 저택을 사풍궁으로 명령하여 현판을 쓰도록 하였다. 또 태평정 주위에는 많은 희귀 화초와 진기한 과수들을 심고, 남쪽에는 연못을 파 그곳에 관련정을 세웠으며 북쪽에는 양이정을 신축하여 청기와를 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암괴석을 모아 절벽을 만들고 물을 끌여들여 폭포를 조성하였다.

 

의종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해 측근들은 화려하고 진귀한 물건을 발견하면 여지없이 왕에게 올렸으며, 그 때문에 백성들은 물건을 빼앗기거나 돈을 갈취당하는 등 많은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왕권이 강해졌다는 판단을 한 의종은 식직시켰던 정함에게 다시 합문지후를 제수하고 대궐로 불러들였다. 또한 점쟁이 영의을 내사령에 임명하고 그의 말에 따라 정사를 진행하였다.

 

영의는 자주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찰을 수리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의종은 그의 말에 따라 대거 사찰 중수작업을 벌이는 등 암암리에 불교 세력을 양성하였다. 그래서 총지사 주지 회정과 자주 담소하며 시를 짓고 놀기도 하였는데, 회정은 의종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권력을 행사하며 승려나 관료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아 챙기곤 하였다. 또한 의종은 시를 짓는 내관들과 악공들을 데려다놓고 밤새도록 주연을 즐기는 일도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