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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9 : 고려의 역사 137 (제18대 의종실록 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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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69 : 고려의 역사 137 (제18대 의종실록 4)

두바퀴인생 2011. 9. 24. 03:53

 

 

 

한국의 역사 369 : 고려의 역사 137 (제18대 의종실록 4)

 

 

제18대 의종실록

(1127~1173년, 재위 1146년 2월~1170년 9월, 24년 7개월)

 

2. 환관정치의 주역 정함과 그 주변 인물들

 

의종은 문신들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여 근위 세력 확충에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내관들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환관정치'라는 기형적인 정치형태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내관들 중에서 특히 환관들이 의종의 신임을 얻어 권력을 남용하는 바람에 정치가 부패해지고 위계가 문란해진 것을 백성들이 비꼬아 이른 말이다.

 

고려시대의 내관은 고자로서 내시직에 있던 환관과 고자가 아닌 문관 출신이면서 궁 내부 일을 맡아보던 일반 내시가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유능한 젊은이를 왕의 측근에 두고 정사를 돌보게 하던 광종 이후의 궁중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고려는 중국과 달리 생식기를 거세하는 궁형이라는 형벌이 없었으므로 환관은 대개 어릴 때 개에게 물려 남성 성기나 고환을 잃은 자가 태반이었다. 따라서 환관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이들은 내궁이나 내궁의 감옥에서 정7품 이하의 직위를 갖곤 하였을 뿐 조정 관원으로 제수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의종이 측근 정치를 하면서 환관의 힘이 극대화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환관이 정4품의 궁궐 내직인 합분지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며, 2백 칸이 넘는 집을 소유하고 수백 명의 노비를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함이었다.

 

정함은 인종 때 내시서두 공봉관이 되었으며 의종의 유모를 처로 삼았다. 그리고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저택을 하사받고 내전 숭반 벼슬에 올랐다.

 

왕의 두터운 신임을 맏고 있던 정함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강하고 잔꾀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왕이 내전의 신하듫을 모아놓고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 환관이 차서는 안될 서대를 두르고 나왔다. 이것을 우간의 왕식이 보고 대간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쏟아놓았던 것이다. 그러자 이사 집단 이작승이 얼굴을 붉히면서 즉시 대리 이빈을 시켜 서대를 빼앗아 오게 하였다.

 

이반이 정함으로부터 서대를 뺏으려 하자 정함은 그것을 임금의 하사품이라며 내놓지 않았다. 이에 서빈이 강제로 서대를 빼앗았다.

 

서대를 빼앗긴 정함이 곧바로 왕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했더니, 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내시 이성윤을 시켜 이빈을 잡아오게 하였다. 하지만 이빈이 대간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잡지 못하고 대신 대간의 아전 민효정을 잡아다가 집단구타를 한 후에 결박하여 궁성소에 가두었다.

 

연회가 끝나고 의종은 자신의 서대를 풀어 정함에게 주고 민효정은 형부 옥에 가두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간에서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빈이 정함에게서 빼앗은 서대를 내시원에 반환했다. 하지만 내시집사 한유공이 이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에 걸쳐 대간에서 사정을 하며 서대를 돌려주자 겨우 못 이기는 체 하고 받았다.

 

그 후 대간과 내시원 사이에 일대 격심한 싸움이 벌어졌다. 대간들이 집단으로 출근을 거부하며 문제가 있는 내시들을 벌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의종은 별 수 없이 이성윤, 한유공 등 내시 5명을 해직시켰다. 하지만 정작 서대를 했던 정함은 무사하였다.

 

정함은 이 사건 이후 왕의 힘에 의지하여 기고만장하 태도로 일관하였고, 드디어 합문지후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중서문하성의 관원들이 모두 출근을 거부하며 농성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왕은 한참 만에 정함의 벼슬을 거두고 관원들과 타협하였다.

 

그러나 얼마뒤 정함은 다시 합문지후에 복직되었다. 이 때도 대신들이 대거 출근을 거부하며 정함을 파직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에 맞서 왕도 밥을 먹지 않고 버티며 정함의 합문지후 제수에 서명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평장사 최윤의를 비롯한 중신들이 하는 수 없이 서명하여 정함은 드디어 조정 백관들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조신의 반열에 오른 정함은 조정에 친척과 도당들을 끌어들여 패거리를 형성했고, 관노 왕광취와 백선연을 내시로 끌어들여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며 왕의 타락을 부추겼다. 정함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재상이나 대간들도 그의 행동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엄청난 뇌물을 받고 상인들의 이권을 조정하기도 하였고, 뭇 평민들의 물품을 갈취하여 재산을 증식시켰다. 그래서 대궐 30보 밖에 무려 2백 칸이 넘는 집을 짓고 곳곳에 누각을 마련하였는데, 그 규모가 흡사 왕궁과 같았다고 한다.

 

그가 끌어들인 남경의 관노 출신 백선연과 왕광취는 왕의 침실을 제 방 드나들듯 하며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그들에게 아부하던 서리 진득문이라는 자에게 보성판관 벼슬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또 백선연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관비 출신 궁녀 무비는 의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며, 광주의 서기 김류는 백성들의 재산을 토색질하여 백선연에게 바쳐 내관이 되기도 하였다.

 

정함의 힘은 단순히 내관을 키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과거 출신으로  첨사부 녹사로 있던 김존중과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김존중은 정함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내시에 소속되었다가 당시 형부낭중 기거주 보문각 동제학에 오른다. 이 때 김존중은 정함과 협의하여 대간들을 이끌며 의종의 행동을 규제하던 중신 정습명을 탄핵하여 죽게 만든다. 그러자 정함은 그를 왕에게 적극 추천하여 우승선에 오르게 만든다.

 

우승선에 오른 김존중은 내시낭중으로 있던 정서를 역모죄로 몬다. 정서는 의종의 모후 공예왕후 임씨의 여동생 남편이었으므로 의종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정서는 평소 의종에게 위협적인 존재이며 한때 그를 밀어내고 왕이 될 뻔한 대령후 왕경과 왕래가 잦았다. 의종에게는 그들의 친분이 못마땅하였고, 그러한 의종의 내면을 읽고 있던 정함과 김존중은 정서와 대령후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였던 것이다.

 

김존중 역시 정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터라 좌간의 왕식과 기거주 이원응을 시켜 정서를 역모죄로 탄핵하게 만들었다. 이 고변으로 정서는 동래로 귀양갔으며, 이 귀양지에서 <정과정곡> 등의 고려가요를 남기게 된다.

 

이후 김존중은 정함과 결탁하여 자기에게 아부하는 자는 등용하고 거역하는 지는 제거하였으며, 매관매직을 일삼아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도 그의 권세를 믿고 뇌물을 받아 챙겨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았다고 한다.

 

1156년 그가 등창으로 앓아눕자 아부하는 자들이 그를 문병하기 위해 집 밖에까지 줄을 섰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자 의종은 심히 슬프하며 그에게 수충내보 동덕공신이라는 칭호와 이부상서 정당문학 수문전 태학사 벼슬을 추증하였다.

 

정함과 함께 의종의 힘에 의존하여 권력을 남용하던 또 하나의 인물은 점쟁이 출신 영의였다. 반역자의 후손인 그는 정함에 의해 내시에 발탁되었다가, 내시사령으로 승진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점궤에 능하고 풍수에 통달했다고 말했는데, 의종은 그 말을 믿고 항상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중승 고영부와 시어사 한유정, 최균심 등이 합문 밖에서 엎드려 3일 동안이나 그를 내쫓을 것을 상소하였으나 의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토록 의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영의는 왕을  이 사찰 저 사찰로 데리고 다니면서 항상 기도하고 제사할 것을 조언하였는데, 의종은 그의 말에 따라 법회를 베풀기도 하고 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대간들이 모두 출근을 거부하며 왕에게 미신에 따른 제사의식을 멈출 것을 간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영의의 권력은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뇌물를 바치고 관직을 얻고자 하는 자들로 항상 붐볐으며, 또 매관매직하여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이들 내관들은 모두 정중부의 난 때 효수되거나 참형에 처해졌다. 무신들의 반란은 곧 환관정치의 종식이자 내관들의 몰락을  의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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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이처럼 내부적으로 썩고 병들어 가고 왕이 타락하고 무능하다보니 무신들의 정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것은 과거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로 불변의 진리처럼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권력은 부패하고 영원한 권력도 없으며 무능한 지도자가 통치하는 나라는 격심한 갈등과 혼란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반란과 반정의 격변을 겪거나 외세의 침공으로 멸망을 당하는 비극을 초래하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