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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마음의 평안

우면산의 가을 9 : 아들 장가 가는 날 3

 

 

우면산의 가을 9 : 아들 장가 가는 날 3

 

 

 

                                                                                         결혼식장 전경, VIP 웨딩홀

 

아침 일찍 아들은 신부를 데리고 예식 준비차 먼저 나가고 우리는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에 나는 양복을 챙겨입고 마누라는 한복을 챙겨 9시까지 예식장 미용실로 가야한다고 했다. 같이 택시를 타고 가면서 요즘 택시 사업이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택시가 힘들다고 했다. 택시를 탈 때마다 물어보는 질문이지만 모두가 자신들에게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경기가 어려우니 택시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10여 분이 자나자 바로 VIP 웨팅홀이 나타났다.

 

마누라는 미용실에서 메이크업을 하는 동안 나는 예식장 주변을 이리저리 돌러보면서 경치를 구경했다. 주변은 온통 먹자 골목이고 식당, 노래방, 주점, 카페 등이 즐비했다.  조금 지나니 딸애가 도착했다. 12시 예식이라 아직 시간은 충분하였고 설레는 마음으로 초초하게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10시 쯤에는  서울에서 처형네 대가족들이 봉고차를 타고 도착했다. 몸이 힘드신 큰처형은 부축을 받으면서 차를 내렸다. 그분은 나의 장인.장모 노릇을 하느라 어려운 걸음이지만 힘들게 내려오신 것 같다. 지난번 장애아였던 40세 가까운 딸을 천상으로 보내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격심한 고통을 받은 듯  갑자기 많이 늙어 보였다. 딸만 셋이였던 큰처형은 아들이 없는 집안이라 장인.장모 노릇을 하면서 나를 아들이나 사위처럼 대해 주었고 우리 아들 장가 가는게 마치 자신의 손주처럼 기뻐하였고, 막내 동생인 마누라가 대견하게 보였을 것 같다.

 

 

 

 

처가 이야기를 좀 하겠다.

 

마누라와 처형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해방 후 서울에 전철이 다닐 때,  장인 어른은 청량리 전철역에서 최소한 역장 정도를 지낸것 같다. 생모가 세 딸을 낳고 돌아가시고 장인 어른은 새로 젊은 여자를 얻어서 세 딸을 키운 모양이었다. 친엄마도 없이 어린 간난아이였던 마누라는 언니들 품에 안겨 자라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 어른인 아버지까지 돌아가시자, 그 많던 재산은 연기처럼 하나 둘 사라지고 처가집은 몰락의 길로 빠진 듯하다. 재산은 대부분 새 엄마와 삼촌들이 강탈해 가고 세 딸에게는 거의 무일푼으로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것 같다. 

 

세 딸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뚝섬 근처에서 어렵고 가난하게 살아오다가, 70년 대 내가 임관 후 소위 시절 5살 아래인 마누라를 만나게 되었다. 마누라는 나를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내가 사귀던 여자가 다니던 직장의 후임이었고 그녀가 직장을 그만두고 가버리자 내가 모르고 계속 보낸 편지를 일일이 읽어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용기도 좋게 나에게 편지를 보낸 당찬 여자였다. 전번의 여자는 동기생 조카였는데, 내가 소개를 받았고 4학년 가을 태능에서 화랑제 축제 때 초청되어 온 여자였다. 그러나 성격이 다소 이상하여 별로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던 때라 그냥 편지만 주고 받았는데, 글쏨씨도 없고 생각도 깊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때 마누라가 나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화를 내며 거절하였으나 재미삼아 편지를 주고 받다 보니 결국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 덕수궁 정문 앞에서 처음 만났고 그후 나는 부지런히 서울로 한달에 두 번 정도 올라왔다. 나의 소위 봉급은 항상 가불했고 용돈이 궁해지자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오고 내가 올라가서 중간 지점인 대전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계룡산에 있는 동학사도 방문하는 등 시간이 갈수록 심성이 곧고 착한 마음이 나를 이끌었던 것 같다. 부유한 집안도 아니지만 나 역시 없는 시골 집안이라 부유한 집안의 여자를 선택하기도 부담이 되었다. 대부분 부유한 집안의 여자들은 버릇없이 자라고 낭비벽이 심하며 가정교육이 부실한 집안의 딸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후방을 수도 없이 이사다니면서도 군 생활의 어려움과 군인의 박봉을 참아내면서 어려운 군인의 아내라는 삶을 살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심성이 착하고 나를 무한정 따라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마누라를 만나기 전에 오랫동안 친구처럼 사귀던 여자도 몇 몇 있었는데, 결국은 마누라를 선택했다. 난 집안도 보지 않았고 가문도 보지 않았다. 장인 장모도 없는 오로지 한 여자만 보고 결혼을 청했던 것이다.

 

 

 

난 김해로 전출가서 교관 생활을 하면서 중위를 막 달고 결혼을 했는데, 우린 김해에서 단칸방에서 솥단지와 밥그릇, 수저, 이불만 준비하여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누구도 우리를 도와줄 형편이 넉넉했던 집안은 양쪽 모두에게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나의 고향 친구 중 절친했던 5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은 절대로 초대하지 않는다. 지금은 모두 연락도 없이 지내지만, 아내는 그들에게 깊은 사무친 애증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김해에서 근무할 당시 신혼 초에 임신했던 마누라가 친구들이 찿아와서 밤을 새며 놀다가 새벽에는 김수로 왕릉을 구경하고 돌아갔는데, 단칸방에서 밤을 지새며 라면, 술, 안주 등 수발을 들고 앉아 있던 아내가 친구들이 돌아가고 난 그날 밤 새벽에 갑자기 심한 진통을 했는데,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기가 유산을 했던 뼈아픈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촌눔들 객기와 짓굳게하면서 밤을 지새며 힘들게 했던 게 아내에게는 치명적으로 위해를 가했던 모양이다. 그런 이후로 아내는 두번 다시 그 친구들을 반기지도 않지만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찿아오는 것도 싫어했다. 죽은 아이가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항상 되뇌이면서 아내는 가끔 먼 하늘을 바라보곤 할 때면 난 미안한 마음에 모든 욕심을 버리고 항복하기 일쑤였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애도 많이 먹였고 고생도 많이 시켰다. 전.후방을 따라다니며 두 남매를 키우느라 생고생도 많이 했고 성격이나 침해까지 나타나 건강이 좋지 못했던 우리 어머님과 아버님을 모시느라 마음 고생도 많이 했다. 그래도 오로지 남편 한 사람을 믿고 끝까지 따라주었기에 오늘에 이른 것이다. 누님들이 여럿 있었지만 나를 아들처럼 키우신 대구 큰누님은 공무원을 퇴직하시고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가 폐결핵이 걸리자 나에게 전화를 하여 어머니를 데려가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님을 서울로 모시고왔는데, 마누라와 아이들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어머님의 병세를 이야기 하고 주변을 항상 깨끗이 하고 할머니에게 너무 가까이 하지 말 것과 같이 살아야 하기에 할머니를 잘 모시라고 이야기 했다. 당시 대전 계룡대로 이전한 육본에 근무할 때라 난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왔는데, 집에 도착하면 우리 애들은 비상이 걸렸다. 달력에 표시된 지난 일주일 동안  잘한 일과 못한 일에 대해서 나에게 검사를 받았다. 못한 일에 대해서는 손바닥을 회초리로 그 숫자만큼 사정없이 맞았고 잘한 일에 대해서는 건당 천 원씩 용돈을 주었다. 엄마에게 잘못하던, 학교생활을 잘못하던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엄마의 판정하에 본인이 수긍하면 본인이 직접 달력에 표시하도록 했다. 눈물과 기쁨이 범벅된 당근과 채찍의 교육법이었다. 그래서 우리애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고 엄마 말을 잘 듣으며 비교적 착하게 자란 자식이 된 것 같다.  

 

양구에서 중대장을 마치고 다목리 15사단으로 전출가서 1년쯤 지난 때 나는 참모를 거의 마칠 때쯤 사단장이 교체되었다. 전임 사단장은 대대장을 매우 신임하였기에 대대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사단과 연대 지역을 돌아다니다 저녁이면 전방 연대장 숙소에서 나에게 전화를 하여 '별일 없냐?',' 네, 별일 없습니다. 지시사항 있으십니까?" 그 정도였고 대부분 대대 일과는 내가 정리하고 결산하였으며 내일의 할 일을 지시하곤 했다. 난 대대장의 마음을 대략 읽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일을 내가 처리했다. 그만큼 나를 신임하였고 밑긴 것이었다. 난 특별한 임무나 지시 사항만 전달받고 내일 일과를 준비해 두었고 주어진 임무마다 즉각 시행하여 대대장이 사단장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대대장은 나를 신임하였던 것이다. 난 사무실에서 거의 숙식하다시피 했으며 라면을 연속으로 오래동안 먹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새로 부임한 사단장은 전번 사단장과는 다른 분이셨다. 성격이 호랑이같아 수시로 야적 창고 지역을 순시했다. 각종 자재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 번 지적하더니 며칠 후에 다시 창고를 순시하고 불량하다며 불호령을 내리면서 대대장을 불러 야단을 쳤다. 각종 자재를 두부를 짜른듯이 정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대대에서 아무리 정리를 잘 해도 두부 짜른 것처럼 자재를 정리할 수는 없었다. 매일 수불행위가 이루어지는 야적 창고에서 무슨 두부처럼 자재를 정리 한단 말인가! 사단장은 부임하자마자 이미 사단 기무부대장으로부터 우리 대대장에 대해서 상세한 부정적인 보고를 받고 있었다. 대대장은 사단 헌병대장과 친하였고 사단 헌병대장과 같이 모연대장 관사에서 만나 저녁에는 통상 고스톱을 자주쳤기에 그 사실을 듣고 새로온 사단장은 대대장을 보직을 해임시키려고 작정하였다고 했다. 전임 사단장은 12.12 사태 이후 설치된 국보위로 선발되어 갔으며 온순한 덕장이었고 우리 대대장을 최고의 대대장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슨 임무던지 주어지면 즉각 시행하였고  대대장은 항상 사단장 곁을 따라 다녔다.

 

결국 수차례 지적된 창고 문제로 대대장이 보직 해임까지 들먹거렸다. 대대장은 급히 전임 사단장에게 지원을 요청하면서 하소연을 하였고, 이에 아마 전임 사단장이 현재 사단장에게 전화를 한 통 한 모양이었다. 한바탕 혹역을 치른 대대장은 임기를 얼른 끝내고 진급 자리인 국방부로 영전해 갔다. 후임 대대장이 부임하였는데, 이 분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융통성이 전혀 없는 분이셨다. 공문이 하달되면 첨부된 설계도를 일일이 점검하고 치수를 재고 육군본부 감실 설계실로 전화해서 담다자에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다. 각종 보고 사항도 레로이로 보고서를 만들어 미니차드를 들고 가야 결재를 받아오는 사람이었다. 당시 레로이로 미니챠드를 만드는 일은 매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로 밤을 세우기가 일쑤였다. 아침에 보면 오탈자 투성이라 다시 쓰고 만들기를 수십번, 대대장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독촉을 하며 난리를 쳤다. 그 분은 상급부대 검열을 자주다녀서 각종 부조리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물건이 납품될 때마다 자신이 직접 일일이 검수하여 불량품을 퇴짜를 놓았다. 또 어느날 납품업자가 봉투를 내밀었는데 그 사람 면상에다 내팽개치는 강직한 성격이었다. 그러자 업자들은 헌병, 기무, 참모장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래도 대대장은 전혀 먹혀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결산은 통상 새벽 1~2시경에 끝났다. 화가나면 재털이를 던지고 참모 정강이를 차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사모님은 한 수위로 나와 가족을 직접 불러다가 야단을 쳤다. 결재 문서는 사단의 모든 참모에게 모두 협조 사인을 받아야 사단장 결재를 받았다. 공문 한 건 결재하는데 보통 보름 이상 걸렸다. 시기를 놓치고 일이 되는 게 없었다. 연대에서 협조를 요청하면 문전박대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군사령부 등 상급부대 회의를 갈 때면 용돈을 챙겨주면 어디서 나온 돈인지도 모르고 가져가기는 잘 가져갔다. 내가 떠난 온 후 행정과장이 대대장의 용돈을 계속드렸는데, 갑자기 보직 해임이 되면서 간부들의 적금까지 끌어다 쓴 결과가 나와서 모두 변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난 답답하였고 고민했다. 융통성이 없는 대대장으로 인해 모든 분야에서 어려움이 속출했다. 사단 참모, 직할대는 물론 각종 검열, 측정, 감사 등에서 지적사항이 속출하였고, 인접부대 협조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대대장을 욕을 하면서 대대장이 미워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이었다.

 

나에 대한 서울 전출 명령이 육본에서 내려오자 대대장은 나를 절대 보내지 않겠다며 무조건 못간다고 했다. 그러나 난 그곳을 떠나야 하겠다고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대대장의 반대와 사단장의 징계 명령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육본 명령에 따른 것 뿐이라고 했다. 내가 한동안 고심하고 있던 차, 사단장 비서실장이 나의 동기생이었는데, 사단장이 불러 나에 대해 여러가지를 물어보더니 결국 허락이 났다고 했다. 물론 동기생이 나를 적극 사단장에게 홍보한 효과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난 겨우 서울로 전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난 결국 서울 미8군 영내에 있던 한미연합사로 나왔지만 대대장은 그 해 년말 대대에서 불이 나 막사가 전소하고 병사가 한 명 타죽은 바람에 결국 보직 해임되고 말았다. 결국 불행한 일로 끝나고 말았는데, 그 분은 나중에 육본에 근무하면서 가는 곳마다 언쟁을 벌이며 고지식한 성격을 바꾸지 못했다. 성격이 너무 곧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융통이 전혀 없는 외골수였다. 전역 후에는 영창악기에 들어가서 근무하다가 얼마되지 않아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세상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난 한미연합사에서 3년을 근무하다가 진해 육대로 내려갔다가 진급되어 대대장을 나가기 전까지 용인 3군사령부 작전처에 배치받았다.

 

그동안 가족은 대방동 아파트에 살았고 대대장 명령이 철원으로 발령나면서 우리는 철원으로 이사했다. 동송에 있던 대대장 관사는 처음에는 15평 관사에 입주했으나 참모장의 지시로 시내쪽에 있던 구형 관사로 이사했다. 구형 관사는 평소 사용하지 않아 대규모 수리를 해야 했고 넓은 공터가 있는 관사로 예전에는 사단장이 사용하던 관사였다. 관사를 수리하고 공터에 텃밭도 일구고 어머님과 같이 살았는데, 침해끼가 시작된 어머님과 같이 사느라 마누라가 마음 고생도 많이 했다. 관사가 넓고 방이 많아 한겨울에는 하루에 20장 가까운 연탄을 밤새워 갈아야 했고 아이들은 동송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대대장은 힘들었지만 정말 보람있게 보냈던 것 같다. 한 사람의 병사도 사고로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간부들에게 각종 사고예방에 철저한 당부를 하였고 수시 점검을 하였다. 수시로 취약지역을 돌아보았고 밤에도 낮에도 공사장에서도 항상 안전에 최우선적으로 강조하였다. 차량운전도 방어운전, 안전운전, 서행을 강조하였고, 화재 등 사고 예방은 물론, 병사들 간에 폭행, 구타에 대해서는 엄벌을 내렸고 그런 가운데도 매분기 대대체육대회를 실시하였다.

 

체육대회는 축구,배구를 포함하여 태권도를 종목에 포함시켰다. 태권도는 계급별로 정해진 급수 이상 받아야 했으며 모든 휴가, 포상, 진급의 기준은 계급별로 태권도 급수를 이수하지 못하는 병사는 금지시켰다. 그래서 대대의 각 중대는 밤낮으로 태권도 붐이 일었고 야간에는 막사 뒷편에 외등을 설치하여 병사들이 연습을 할 정도였다. 체육대회도 태권도 점수를 가장 많이 부여하여 자유 대련, 격파를 포함하여 전 중대원이 지정된 형을 몇가지 이상 실시하도록 했다. 그래서 대대는 유단자가 거의 0%에 가까웠던 실적에서 1년이 지나자 유단자가 대대원의 50%를 넘는 경이적인 목표를 달성하여 사단을 깜짝 놀라게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군사령부에서 전 부대 유단자를 목표로 태권도를 엄청 강조하던 시절이었다.

 

체육대회가 끝나면 연병장에 중대별로 탁자를 마련하여 막걸리와 돼지고기 등 안주를 준비하여 오락시간을 가졌다. 중대별로 장기자랑, 노래, 군가 등을 부르며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보낼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물론 상품도 푸짐하게 준비하여 경기는 물론 장기자랑에서도 심사를 하여 포상휴가증과 같이 상을 주었다. 동송에 있는 자매다방 주인이 아가씨들을 부르면 커피를 들고 찿아와서 흥겨운 시간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이야 그렇게 못하겠지만......

 

체육대회를 포함, 임무 수행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한 병사들에게는 무조건 포상 휴가를 보냈다. 아마 2년 동안 대대원의 4배수는 보냈던 것 같다. 포상 휴가를 저축하여 정기휴가와 같이 가기도 하였다. 단 태권도는 계급별로 이수해야만 가능했다. 병사들은 언제라도 자신이 원하는 날 언제라도 포상휴가를 갈 수 있었고 가정에 흉사이거나 길사가 있는 특별한 경우는 태권도 제한은 예외로 해주었다.   

 

 

 

                                                                                     웨딩홀 건너편 서구보건소

 

재임간 사단은 박살선 공사를 하면서 DMZ에 여러 보병대대와 장비와 병력을 투입하여 대규모 철책공사를 실시하였다. 난 증강된 1개 중대를 투입하여 물골공사와 교량공사를 실시하였고 도쟈.포크렌 등 여러 대의 장비와 시멘트, 목재, 합판, 유류 등 공사자재를 추진하였다. 공사지역 지뢰제거는 수색대대, 전후방 경계는 전초대대, 철책설치 공사는 연대에서 차출된 보병 2개 대대가 투입된 전략적인 공사로 GP-GP를 잇는 철책선 설치 공사였다. 어느날은 대전차지뢰가 터져 포크렌이 당하였고, 도쟈가 지나간 진흙속에서 지뢰가 터지지 않고 보이기도 하였다. 녹쓴 대전차 지뢰, 목함지뢰, 폭풍지뢰가 수도 없이 수거되었다. 물골 공사시에는 기초 공사를 위해 포크렌으로 간이댐을 막고 물을 퍼 올리면 천연 장어, 붕어, 메기 등 물고기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수개월에 걸친 공사로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큰 사고 없이 철수하였다.

 

 

 

 

                                                                                웨딩홀 앞 도로

 

어느날 인접 동송에 있는 동송여자고등학교 교장이 찿아왔다. 그 학교는 도교육청으로부터 하키를 전문으로 지정된 학교였는데,  하키 골대가 뿌러져 몇 가지 용접을 부탁해 왔다. 그래서 용접 장비를 보내 하키 골대를 포함하여 용접 작업이 필요한 곳은 모두 정비를 해주었다. 그러자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교장으로부터 장병을 위문을 해도 되겠느냐고 문의가 왔다. 나는 흔쾌히 반기면서 위문을 허락했다. 지정된 날, 대대식당에 간이 무대를 설치하고 전 대대원을 저녁 식사 후 집합시켰다. 여고생 대표들이 위문품을 봉고차에 가득 싣고 나타났다. 난 교장을 포함하여 여고생들을 맞이하여 대대장실에서 차를 한 잔씩 마시면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들을 안내하여 식당에 들어서자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예쁜 여고생들이 나타났으니 병사들이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시작된 위문공연은 에어로빅을 포함하여 합창, 노래, 만담, 게그 등 병사들이 까무라칠 정도로 시간 반 정도 환희와 열정의 시간이 되었다. 여고생들이 춤을 출 때마다 병사들의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그렇게 그 해 년말 대대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사단 군수참모한테서 새벽에 전화가 왔다. 지포리에 위치한 대대막사가 불이 나 전소되는 사건이 터졌다. 현장에 달려가서 보니 대대본부였던 막사는 전소되어 벽체만 남고 잿더미가 되어 폭싹 주저앉아 있었다. 사단장 이하 전 참모 직할대장들이 모여 대책을 협의 했다. 병기도 수십 정 타버렸고, 2.4종 군수품도 전소되었으며 막사도 전소된 상태였다. 사단장이 각 직할대장들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복구가 가능하겠느냐?"  병기. 보급 등 모두가 복구와 보충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난 "3일만 시간을 주십시요"라고 하면서 병력은 최대한 지원을 해 달라고 했다. "오케이! 보고 생략, 지금부터 실시!"  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난 대대로 복귀 후 간부들을 긴급 소집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지시했다.1개 중대 투입, 영선반 문틀 제작, 철거 건물 트라스 제거 및 운반.설치, 페인트, 유리, 문고리, 스레트 등 자재 긴급 구매토록 지시하고 필요한 장비도 투입했다. 보병대대 병력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거을음을 제거하고 청소를 실시했다. 철거된 트라스는 긴급 수송하여 벽체 위에 설치하면서 문틀과 창문틀은 영선반에서 제작하는대로 운반하여 설치하였고 구입된 재료를 사용하여 유리끼우기, 페인트 칠, 석까래 설치 및 지붕 합판 잇기, 스레트 잇기를 3일 밤낮으로 실시했다. 3일째 드디어 병사들의 노력으로 건물 복구가 완료되자 모든 것이 원상복구되었다. 병기와 군수품은 우여곡절 끝에 보충되었고 건물도 완공되었던 것이다. 사단장에게 결재를 들어가니 이렇게 말했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체적인 말이 없어도 신뢰가 쌓여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 같다.

 

다음해 겨울이 오기전에 난 이미 철거가 지정된 건물의 트라스를 미리 철거하여 대대에 보관하도록 지시했다. 겨울이 오자 12월 어느날 5검문소 안쪽 대대에서 또 불이나 막사가 전소되었다. 이번에는 자동적으로 복구작업이 진행되었고 역시 3일만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정상적인 보고를 하고 처리해야 할 사안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매년 사단마다 대대막사 한 동씩 정도는 불이나 불에 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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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누라와 딸

 

철원에는 발견된 땅굴이 있다.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안보교육차원에서 방문객과 단체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땅굴 위에는 시추작전을 위해 부지를 밀고 시추공을 여러개 뚫는 등 정지가 되어 있었는데, 어느 여름날 폭우가 내려 땅굴 입구가 마사토와 바위가 흘러내려 메워버렸다. 이번에 일어난 우면산 산사태와 같이 일종의 산사태였다.

 

사단장이 나를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즉시 최대한 빠른 시간에 복구 가능한 기간이 얼마나 걸리겠는가를 물었다. 난 잠시 판단을 한 후 "3일만 시간을 주십시요!" 라고 했다. 땅굴 입구에서 주갱도로 내려가는 경사 계단 길이는 깊이는 약 40~50미터 정도였고 그 통로가 마사토와 바위가 들어가 막혀버린 것이다. 장비도 들어갈 수가 없었고 역갱도 천정은 사람 키 높이 정도였다. "알았어, 3일후에는 관광객들이 밀려올 것인데 반드시 완전하게 복구해야 해! ", "넷! 알겠습니닷!" 라고 나는 복명을 하고 나와 대대로 향했다.

 

현재의 모든 임무를 중지하고 2개 중대장을 불러 상황을 설명한 후에 장비와 질통, 삽, 곡괭이, 단가 등을 준비시키고 천막과 숙영시설도 준비시켰다. 큰 통을 준비하여 안주와 막걸리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현지에는 중대 숙영시설이 구측되었고 2개 중대를 교대로 철야 작업에 투입했다. 처음에는 작업 속도가 느렸고 병사들도 금방 지친듯 하였다. 나는 현장을 방문하여 중대장을 포함 운전병, 그리고 대대장인 나도 시범적으로 질통를 지고 퍼 날랐다. 오르내리면서 병사들을 일일이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격려해 주었다. 병사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난 병사들에게 성공적으로 임무가 완수되면 모두 포상조치하겠다고 천명했다. 힘이 지칠 때 쯤에는 흙을 지고 올라오는 병사에게는 막걸리 한 사발씩 퍼서 마시도록 막걸리를 가득 담은 통과 안주를 입구에 배치해 두었다. 4시간씩 교대로 철야로 진행하였고 이틀 후에는 진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틈틈이 잠을 재우고 교대시켰다. 식사도 특식으로 조치하여 먹였고 부상자와 환자는 즉각 후송조치 하였다. 목표는 3일! 결국 3일만에 우리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진행한 결과 결국 해내고 말았다. 복구가 완료된 다음 난 2개 중대원들에게 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전 중대원을 약속대로 교대로 포상조치 하였다. 

 

우리 대대는 철원 평야에서 우뚝 솟은 금학산 바로 아래 위치한 부대로 금학산의 정기를 타고난 부대였다. 아마 86~88년 당시의 대대원들은 지금쯤은 이미 40대 중반을 지나고 있을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을 것이며 이 사회의 주력군으로 자리메김 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립고 보고싶은 자랑스러웠고 충성스럽던 병사들이었다.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영원하라! 자랑스런 청성부대원들이여!"

 

대대장을 마치고 국방대로 1년간 연수교육을 받았으며 졸업 후 당시 삼각지에 있던 육군본부 작전처로 발령받았다. 서울에 안착한 88년 이후부터 강남 서초동에 어렵게 작은 집을 마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자식 눔들은 집이 좁다고 친구도 데려오지 않았고 가족은 인.친척을 초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난 이 집이 이토록 넓고 아늑한 집이라는 사실을 항상 느끼고 살고 있다. 

     

어느듯 결혼식 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마누라가 화장을 하고 머리도 올리고 한복을 입고 나타났다.

 

지나간 30년이 넘는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삶이 다 그런 것인지, 고달픈 삶이였지만 보람차고 행복하였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아들눔을 장가라도 보낼 수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개착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안도하는 마음이다. 예쁜 얼굴은 지나가는 바람이요, 착한 심성은 천리를 날아가는 향기라 하지 않던가, 부디 둘 다 향기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결혼식 손님 맞이하는 나와 마누라

 

 

 

 

 

                                                                                          양가 가족.친지들

 

 

 

 

 

                                                                                            우리 가족 사진

 

 

 

 

                                                                                        신랑.신부 친구들

 

 

 

 

                                                                                            폐백을 시작하기전

 

 

 

                                                                                             딸애 부부

 

 

 

                                                                                                      신랑.신부 건배

 

 

                                                                                       결혼식장을 찿아준 인.친척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