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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마음의 평안

우면산의 가을 8 : 아들 장가 가는 날 2

 

 

우면산의 가을 8 : 아들 장가 가는 날 2

 

 

                                                                                             저무는 석양

 

창가로 보이는 저녁 석양이 너무나 기기묘묘하다. 구름이 햋빛을 가리면 잠시 후 햋빛이 다시 내비치며 각종 모양의 구름이 나타났다 사라지곤한다. 창가에서 바라보는 저녁 석양의 구름은 미래를 알여주는 듯 형형 다양한 모양을 보여주는 모습을 구경하며 아들집 밤을 보내게 되었다.

 

새 집인양 강아지도 동물병원에 맡기고 우리는 마루에 자리를 폈다. 대형 텔레비젼이 벽에서 화면도 크고 선명하게 나온다. 아들 눔은 친구를 만난다며 나갔는데, 장가 가기전 마지막 밤을 한 잔하려는 모양이다.  혹시나 그릇이나 가구가 깨지거나 흠집이 날까봐 마누라는 모든게 조심스럽고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아들 눔이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다. 32살, 32년간 키운 결과 이제야 스스로의 인생을 출발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출발이 순탄하다고 반드시 중간 과정과 결말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전은 교통의 중심지이며 남한의 중심지이다. 호남 사람들이 많고 재력가는 대부분 그들이다. 그리고 떠내기가 많고 물동량도 많다. 엑스포 유치, 대덕연구단지 이전, 계룡대 이전, 정부청사 이전, 유성 관광특구 등으로 날로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대구.부산에 버금가는 남한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였다. 충청도 인심의 중심이요 농지가 넓고 생활이 비교적 넉넉한 고장이다.속리산, 계룡산, 덕유산, 부여, 공주, 천안, 전주, 대구, 청주, 충주 등 인근 유명산과 관광지 및 중대형 도시들이 가깝고 유동 인구도 많다. 60~70년대 야간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잠시 정차하였는데, 플랫홈에서 파는 우동이 별미엿다. 뜨거운 우동을 단 시간내에 먹고 타려면 맛은 커녕 국물 마시기도 힘들 정도로 빨리 먹다보니 그냥 허기를 채우는데 급급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대도 그 우동이 지금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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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백제의 한이 서려 있는 곳으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신라군을 맞아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백강 전투 패배, 사비성, 공주성이 무너지면서 의자왕은 결국 항복하게 되고 수많은 신하.백성들과 포로로 잡혀 먼 중국 땅 외진 곳에서 쓸쓸하게 죽어 갔다.

 

백제의 의기를 내세우며 다시 일어선 후백제의 견훤은 광주와 전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며 마진의 궁예와 고려의 왕건과 자웅을 가르는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이곳은 견훤이 지배하던 지역으로 수많은 말밥굽이 지나가던 곳이기도 하다.  금산사의 유폐로 아들 신검에게 권력을 강탈당한 견훤은 후일 그 곳을 탈출하여 나주의 고려군 진영으로 가서 고려군의 호위를 받으며 개경으로 왕건을 만나게 된다. 왕건의 온유함과 포용력, 그리고 견훤을 상부로 모시는 자세에 감동하여 견훤은 자신이 세운 나라 후백제를 타도하도록 권유한다. 신검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자신이 앞장서겠다며 왕건에게 강권한다.

 

이에 왕건은 신라, 발해, 후백제 등 민족연합군인 10만에 가까운 왕건의 고려군은 견훤을 앞세우고 마지막 통일 전쟁을 나선다. 아들을 정벌하려는 견훤의 분통함이 어떠하였을까? 자신이 일군 나라를 자신이 앞장서서 멸망시켜 왕건에게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하려는 견훤, 그는 과연 당대의 영웅이었다. 견훤을 본 신검의 후백제군은 대부분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고 이곳 탄현까지 후퇴한 신검군이 마지막 전투에서 고려군에게 항복하게 되면서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견훤은 반정을 일으킨 대부분의 신하들을 주살하고 자신의 과업을 다한 듯 근처 사찰에서 등창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그의 분노가 등창으로 터져나와 후백제의 멸망과 함께 한 시대의 영웅은 사라져 갔다.

 

 

 

 

 

 

 

고려 조에서는 이곳에서 별다른 사건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만큼 이 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 반정이나 반역의 싹이 자리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먹고 살만한 고장이니 선비들이 많아 나왔고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도 많다.

 

그런데 한 번 반란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고려 시대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부패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나라가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던 무신정권의 암울하던 시절, 중앙의 통제력이 미약해지고 극심한 가난과 탐관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천민 집단이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주동이 되어 난을 일으켰다. 이때는 서경에서 조위총의 난이 한창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조정은 조위총의 무리를 서적이라 하고, 망이와 망소이의 무리를 남적이라고 하였다.

 

굶주림과 권력층의 황포에 지친 명학소의 천민 망이와 망소이는 스스로를 산행병마사라 칭하며 봉기하여 공주를 함락시킨다. 하지만 조위총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정은 이들 민란을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지후 채원부와 낭장 박강수를 보내 난민들을 회유토록 했다. 하지만 난민들은 그들의 회유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조정은 대장군 장황재와 장군 장박인을 보내 군사 3천을 내주고 난민들을 토벌토록 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전투를 벌인 결과 난민들에게 대패하자 무력을 통한 토벌을 중지하고 다시금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현령과 현위를 파견하는 등 회유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망이와 망소이가 이끄는 난민들은 회유책을 거부하고 오히려 예산현을 공격하여 감무를 살해하고, 충주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등 점차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때 조위총의 난이 다행히 수습된 단계라 조정은 대장군 정세유와 이부를 남적처치병마사로 삼아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한다. 이렇게 되자 난민들은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마침내 망이와 망소이가 장부군에게 강화를 요청했다. 이에 조정은 그들의 강화제의를 받아들이고 곡식을 나누어주는 등 천민들에 대해 화해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오래가지 못하는데, 정부군이 망이. 망소이 가족들을 체포하여버린 것이다.

 

정부군이 망이. 망소이 가족 체포는 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다시금 대대적인 민란을 유발했다. 이에 다시 궐기한 난민들은 덕산의 가야사를 점령하고 홍경원을 불태우고 등 개경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아산을 점령하고 청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청주목 관할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에 조정은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여 난민들을 공략하였다. 이 때문에 난민들이 완전히 포위되자 그들을 이끌던 망이. 망소이가 항복을 요청해 왔고, 1177년 7월 망이.망소이가 장세유에게 체포되면서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천민들의 난은 1182년 전주 관노들의 난으로 이어진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천민들의 행정구역인 '소'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일반 농민 반란과 다른 점이다. 이들 천민들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천민신분에서 벗어나는 한편 지배계층의 수탈과 횡포를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반란은 고려 사회의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스스로 인간다운 권리를 찿고자했던 일종의 신분해방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몸부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후에도 이러한 고려 사회의 신분질서는 철폐되지 않았고 고려가 망하고

이조가 들어서면서 조선은 유교가 정치. 사회에 근본 사상으로 자리메김하면서 양반과 상눔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 속에서 모든 것은 양반을 위해 양인, 중인, 천민 등 모든 백성들이 노예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회로 정착되고 말았던 것이다. 유교는 지배층을 위한 백성들을 옭아매기 위한 낙후된 봉건 사상체계이로인한 조선의 개혁과 발전은 영원사라졌다.  

 

이러한 조선의 신분제도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보다 더 지독하고 폐쇄적인 신분제도로 결국은 명분과 허례허식에 세월을 허비하였고 양반 지배층의 비리와 부패, 탐관들의 백성 수탈은 강도를 더하였다. 결국 왕권이 미약하고 외척과 선비들이 권력을 주도하던 조선은 유교의 폐습으로 인해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조 선조 당시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웅거하던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터졌다. 왜군이 침공하기 바로 직전에 역모의 고변으로 정여립을 비롯한 수천 명의 선비들이 잡혀 처형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정여립은 기골이 장대하여 무골형으로 당파 싸움에 이리저라 끌려다니다가 지방으로 내려가 자체 세력을 형성하여 군대를 양성하였는데, 왜구의 침입에 관군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자신의 병력을 출동시켜 왜구를 무찌른 적이 있을 정도였다. 지방의 관리가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정여립을 사병을 양성하여 반역을 기도하고 있다면서 고변하자 반대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처벌을 주장하자 무능한 선조는 재야에 있던 정철을 불러 국문토록 하였는데, 정철은 정치적인 개인적인 감정으로 국문을 하였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의 태조는 이곳 계룡산 남쪽 현재의 계룡대 위치에 왕궁을 건립하고 수도로 고려하던 곳이기도 하다. 계룡산은 영험한 산으로 산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산이름 그대로 계룡이 산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름도 그렇게 붙였고 수많은 무속인들이 게룡산 골짜기 마다 움집을 짓고 굿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대전의 무속인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쫒겨난 사람들이기도 하다. 주변 농토가 넓고 산세가 영험하여 기운이 세고 영재들이 많아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평준화 이전에 대전고 출신들이 서울대에 많아 합격한 것도 그렇거니와 대전 출신들이 비교적 정치권이나 사회 생활에서 성격이 무난하고 모나자 않으면서 화합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많다. 충청도 ,호남, 경상도 성격이 두루 섞여 형성된 지방의 고유한 환경 탓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 24사단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뒤이어 대전 지역에 도착하여 금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전개하였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오산 전투에서 12시간 지연시키는 역활밖에 하지 못하고 무너졌 철수하였고 적은 지속적으로 대전을 점령하기 위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하였다.

 

2차대전시 태평양 전투에서 맥아더의 미군은 해전과 상륙전에서는 숙달되어 있었으나 침투, 후회, 포위 전술을 주로 구사하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전투에 숙달된 북한군을 맞아 방어선이 어이없이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야간에 침투한 적은 지휘소, 통신선, 병참선, 후방 지원시설 등을 무차별 공략하자 미군은 당황하기 시작하였고 보고도 없이 전방 연대 병력이 무질서하게 철수하고 말았다. 그러자 시단 방어선은 무너졌고 사단장인 딘 소장은 통신이 두절되자 예하 병력을 수습하기 위해 작전 지역을 헤매다가 길거리에서 만난 부상병을 열 명 이상 찦차에 싣고 이동하다가 적의 포위망에 걸려 찦차를 버리고 부관과 함께 산 속을 헤메다가 민가에 숨어 들었는데, 민간인의 도움을 받으며 숨어지내다가 결국 공산군에게 미군 장성이 그것도 사단장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겪게 된다.                                                                                                                                                            

 

 

 

밤은 아름다움도 감추지만 추함도 감춘다. 아들 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 모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밤이다. 이렇게 인생은 윤회하듯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결혼시키고 그러다가 손자.손녀를 안아보는 것으로 기쁨을 맛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자손이 번창하고 잘 살기를 부모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남겨줄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서민들에게 상속이란 용어도 필요없는 듯하다. 농부였던 우리 아버지보다 내가 좀더 성장하였고 내보다 아들 눔이 더 잘 살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고 내보다 못 산다면 죽을 때까지 마음 속으로 아픔이 가시지는 않을 것이다.

 

                                                                                                   야경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가자 잔금을 치루고 집인 수리를 했다. 견적을 알아보니 천만원이 넘는 돈을 요구했다. 인테리어 업자들이 펑튀기기를 많아 한다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해도 너무한 것 같다. 그래서 아들 눔이 분야 별로 별도로 발주하여 공사를 했다. 그래서 수백 만원으로 끝냈다고 했다. 마누라는 아들이 그동안 용돈으로 준 돈을 모두 저축하여 집 장만에 보탰다.

 

 

                                                                                  집 내부 모습

 

 

 

 

 

 

 

                                                                           아들이 자기가 고친 가장 마음에 드는 화장실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