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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마음의 평안

우면산의 가을 7 : 아들 장가 가는 날 1

 

 

우면산의 가을 7 : 아들 장가 가던 날 1

 

                                                                                            경부고속도로 전경

 

추석 후 주말, 아들 결혼식이 대전에서 일요일 계획된터라 있던 가족과 같이 대전으로 내려갔다.

 

지난번 대전을 다녀오다 고속도로 펑크 사고로 혼이 난 뒤라, 이번에는 바퀴도 교환하고 라이닝도 교체하였으며 엔진오일도 교환하였다. 정기 검사도 검차하였고 주유, 윤활유 치기,녹슨 부분 정비, 페인팅, 네비게이션 달기, 정비 후 시운전까지 마치고 차를 전반적으로 정비하였다. 고장 표시판과 안내등도 준비하고 비상등, 후리쉬, 타이어 교체 공구 등도 준비하였다. 장거리 운전을 우습게 보고 운전하다가 혼이 난 덕택이었다.

 

항상 차를 탈 때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만큼 교통사고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갑작스런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하더라도 반대편 운전자나 뒤 따르는 차, 화물차, 추월, 끼어들기, 급제동, 안개,비 등 기상악화 등으로 인하여 예기치 못하는 사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 대전으로 내려가는 길

 

대전으로 내려가 아들 녀석 집에서 하루밤을 지내기로 했다. 마누라와 강아지 두 마리를 태우고 양복, 한복 등 짐을 싣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인생을 새출발하는 아들 녀석이 자랑스럽다. 직장을 다니면서 꼼꼼이 모은 돈으로 융자를 포함하여 작은 아파트라도 장만하였으니 아비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준 셈이다. 마누라는 장가가는 아들 집에 간다는 마음에 들떠 있는 모양같다. 그런면에서 나도 이제 서서히 인생의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모양이다.

 

전출 명령에 따라 전.후방을 이리저리 이사다니며 가는 곳마다 정도 못 붙이고 금방 또 이사가던 신혼 시절, 양구로 전출가던 날 우리 부부는 부산에서 이사짐을 싣고 대구-서울-춘천을 지나서 소양호를 돌아 돌아 양구로 이사짐 차를 타고 가던 그 날이 생각난다. 그 꾸불끄불한 길이 왜 그토록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졌던지......양구에는 미리 가보지를 못하여 관사도 미쳐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등군사반을 마치고 바로 이사짐을 챙겨 양구로 올라갔다.

 

양구에 도착하여 사단 관사 지역에 무조건 이사짐을 내린 후 이사짐 차는 돌아가고 나는 사단 인사처에 근무하는 3년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관사를 알아보았더니 양구 관사 지역에 아무 곳이나 빈 관사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래서 난 잡풀이 무성한 빈관사를 찿아 부대에 연락하여 선배에게 부탁하여 급하게 수리를 하고 들어갔다. 부엌에는 나무로 밥을 하고 군불을 피우는 아궁이가 있었고 변소는 재래식으로 인분이 가득하였으며 방 구둘장은 연기가 샐 정도로 삐그덕 거렸고 마루는 나무 판자가 썩어 내려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구형 관사였다.

 

마누라는 서울 토박이 출신이라 나무로 밥을 해 본적도 없고 군불도 뗄 줄을 불랐다. 불 소시게로 불도 피울줄 몰랐고내가 시범을 보이는 동안 옆에 서서 연기 자욱한 부엌에서 연신 기침을 콜록거렸다. 그때 이미 큰 애를 임신 중이라 시골 생활을 해보지 않은 마누라는 그 당시 고생도 무척 했을 것이다. 아는 사람도 없고 친구도 없는 최전방에서 마누라는 외로움과 고독에 지쳐 오로지 남편만을 믿고 의지하며 신혼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이웃 관사 군 선배들 가족들과 사귀게 되었고 양구시내에 있는 교회도 나가게 되었다. 자신을 반겨줄 곳은 교회였기에 마누라는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세월은 흘러 양구에서 대대 참모, 중대장을 하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다. 무장공비 출현으로 소탕 작전, 장애물 거부작전, GOP 전기 인입공사, 교회 신축 공사, 블럭 생산 등등 중대장 시절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지낸 것 같다. 대대장님은 나의 중대에 탈영전과자, 사고친 병사 등 골치아픈 병사는 모두 우리 중대에 보냈다.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이 "박 대위가 부하 관리를 잘 할 것이니 책임지고 관리를 잘 하도록 하게.." 대대장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부부가 극성이었다. 사고가 나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단장이 지시해도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말했다. 자신은 이미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기 대문에 무사히 대대장직을 잘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도 콜라를 마시고 5분 정도 앉아 계시다가 참모, 중대장들을 보면서 "잘 멀고 놀다가 오라"면서 먼저 일어나시는 분이셨다. 그 분은 나를 무척 아끼셨고 총애하셨다. 난 그 분의 신앙인으로 비리와 부정을 몰랐으며 심성이 곧고 바른 분이라 믿고 따랐으며 그 분의 말씀이라면 어떠한 임무라도 능히 수행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 분은 대령 진급을 못하시고 문관으로 육본에 근무하시다가 퇴직 후 90년대 초 한강 골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스트레스를 받아 후두암으로 돌아가셨다.  

 

중대장을 마친 후 난 중부전선 15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났다. 난 먼저 출발하고 마누라는 뒤에 연락을 하면 이사짐을 챙겨 오도록 했다. 그동안 첯째 딸애는 대구 우리집에 내려가서 태어났고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양구에는 마침 참모 자리가 곧 비게 되어 1년 선배가 육대를 가게 되었다면서 나에게 참모 자리를 인계해 주었다. 마침 대대장님도 선배로 인사를 드렸더니 흔쾌히 승락해 주셨다. 넓은 참모 관사에서 겨울을 맞았다. 그런데 펌프가 동파되어 물을 개울에서 길어와야 했다. 물기게를 져 본 적이 없는 마누라는 물지게를 지고 걸음을 전혀 걷지 못 하길레 마침 내가 지나가다가 그것을 보고 물을 길어 주었다. 시골에서 난 물지게를 많아 져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은 이곳 15사단 다목리 관사에서 태어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산기가 있어 찝차로 춘천으로 나가다가 산기가 심하여 사단 의무대에 들어가서 당직 군의관의 도움으로 순산했다.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난 군의관에게 고맙다고 5만원을 주며 인사를 하고 마누라와 아기를 데려왔다. 그 때 태어난 아기가 바로 이번에 장가 가는 아들 눔이다.  

 

 

 

 

하늘도 청명하게 보이고 바람도 시원하다. 주변의 모두가 우리를 축복을 해 주는지 아름답게만 보인다. 나의 착각일까? 우리들 주변에는 아직 짝을 찿지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자식 자랑은 아니지만 난 자식이 하겠다는 대로 그대로 두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아는 녀석들이라 변변한 해외연수도 한 번 못 보냈고 대학도 포기하고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했다. 로봇 관련 회사로 공장 자동화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스스로 길을 선택했고  자신이 살아갈 길을 꾸준히 개척해 나갔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그래도 비교적 많이 변하여 제대했으며 직장 생활도 성실하게 잘하고 있고 회사 사장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이 대전 지역을 믿고 아들에게 맡긴 모양이다.

 

 

                                                                         아들집에서 바라본 대전 시내 전경 

 

새로산 내비 덕분에 쉽게 찿아 유등마을 쌍용아파트에 도착하였다. 꼭대기 층인 25층이라 엘리베이트가  한참 올라갔다. 집안에 들어서니 전망도 좋고 경치도 좋았다. 창문을 열어 놓으니 바람도 거세게 불고 지나간다. 수리를 하여 신혼집으로 만들었고 비용도 제법 들었다. 아파트가 촘촘한 주변의 풍경이 아득하게 멀리 보인다. 이제 이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아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싶다.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견디며 부디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