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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300 : 고려의 역사 68 (제6대 성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300 : 고려의 역사 68 (제6대 성종실록 2)
제6대 성종실록
(960~997, 재위 981년 7월~997년 10월, 16년 3개월)
1. 유학 정치이념의 실현자 성종과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계속)
또한 성종 원년 982년 6월에는 체제를 정비하며 정치이념을 실현하는데 명확히 할 목적으로 5품 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봉사(밀봉한 상소문)'를 올리게 하였다. 이 때 최승로의 '시무 28조'가 채택되어 정치 방향과 체제 정비를위한 기본적인 골격이 형성되었으며, 990년 김심언이 올린 '육정육사'에 관한 봉사를 통해 올바른 신하상이 확립되었다.
최승로의 상소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첯째 부분은 봉사를 올리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며, 둘째 부분은 태조부터 경종에 이르는 5조의 정치를 평가하는 내용이며, 셋째 부분은 '시무 28조'이다.
'시무 28조'는 불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일관하고 있는 반면,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른 군신관계 정립과 광종대의 노비안건법으로 양인이 된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되돌려놓는 노비환천법 실시를 주장하여 귀족 중심의 사회신분제도를 확립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성종이 신하들에게 봉사를 올리게 한 목적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확립이었다.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개국공신 세력 중심의 귀족들과 광종대에 과거로 진출한 신진관료, 신라 귀족 계통의 학자와 유력가들의 힘을 필요로 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이러한 세 세력을 통치체제 속으로 끌여 들일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이 있었고, 성종은 그 장치들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시험하게 된다.
중앙집권 체제 확립과 유교사회 건설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운 성종은 983년 성종 2년 2월 최승로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체제 정비 작업에 돌입한다. 3성 6부제를 도입하여 중앙관제를 확립하고, 10도 12목으로 지방조직을 중앙집권적 틀 속으로 완전히 복속시킴으로써 중앙집권 제제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일련의 행정조직 개편에 의한 중앙집권화 계획은 982년부터 995년까지 13년간 지속적으로 추진된다.
흔히 3성 6부제로 대표되는 중앙관제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3성과 이, 호, 예, 병, 형, 공부 등 6부를 가리킨다.
이 제도는 982년에 설치한 내문하성 및 어사도성과 어사 6관(선, 민, 형, 예, 공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995년부터 내문하성이 중서문하성으로, 어사도성이 상서도성으로 개칭되면서 3성 6부 체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한편 지방제도의 근간이 되는 12목은 중앙에서 주목이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을 관할하게 하는 것으로서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다. 목이 설치된 곳은 양주, 광주, 충주, 청주, 해주, 공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황주 등 고려의 혈관을 있는 12곳의 요지로, 건국 초기에 이곳에 머물던 호족들의 힘이 막강하였으나 광종 대의 호족 숙청작업을 거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중앙집권 체제 내에 흡수되었다.
12목 설치가 완료되자 성종은 주, 부, 군, 현의 관리를 교체하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고, 995년에는 전국을 다시 열 개의 도로 나누는 10도제를 도입했다.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만든 이 10도제는 행정적 의미는 적었으나 지역을 처음으로 도 단위로 구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3성 6부제와 12목 설치로 행정조직을 대폭 개편한 성종은 유학과 생할학문 진작을 위해 일관된 교육정책을 단행한다. 우선 유교적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고, 12목에다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 지방 교육을 장려했다. 또한 각 지방에서 유학이나 의술이 뛰어난 인재들을 중앙으로 불러 관직을 주기도 하였다.
교육에 관한 성종의 열정은 989년에 내린 다음 교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짐은 지금 학교를 확장하여 국가를 다스리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을 많이 두고 학생들을 널리 모집하여 이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학문이 높은 사람들을 파견하여 선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해마다 갑을과를 치러 수재들을 선발하고 날마다 숨어 있는 학자들을 찿아내어 그들을 우대하라. 박식한 선비들을 찿아내어 나의 부족한 정치를 돕게 하고 항상 분발하여 피곤을 잊도록 하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배우는 자는 쇠털처럼 많으나 성공하는 자는 기린의 뿔처럼 드물며 국학에 이름을 올린 자는 많으나 자나깨나 걱정이도다."
교육정책과 함께 성종은 민간에 효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989년 12월 병인일의 교서에서 성종은 아렇게 말하고 있다.
"옛날에 당 태종은 자기 부모가 죽은 달에 가축 도살을 금하고 국내 사찰에 명하여 5일간 불공을 드리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그런데 짐으로 말하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부모의 무한한 은혜를 갚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추모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어찌 옛일을 본받아 나의 열망을 실현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태조와 아버지 대종의 제삿날을 전후하여 5일간, 어머니 선의왕후 제삿날을 전후하여 3일간 불공을 드리도록 하라. 그리고 제사 드리는 날에는 도살을 금하고 고기 반찬을 올리지 않도록 하라."
이 교서는 비록 유교의 중심 사상인 효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천 방법으로 불교를 택하고 있다. 이는 성종의 숭유정책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은 여전히 불교를섬기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유교는 일부 귀족과 신진관료를 세력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종의 유학진흥책은 지배계급에게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서도 정5품 이상의 관리 자제들을 시험 없이 등용하는 음서제와 같은 임용제도가 있었지만 과거만큼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리고 과거를 위해서는 의당 경학과 시, 문장을 공부해야 했고, 이것이 곧 부분적으로나마 유학을 진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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