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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99 : 고려의 역사 67 (제6대 성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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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99 : 고려의 역사 67 (제6대 성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7. 14. 09:55

 

 

 

 

 

 

한국의 역사 299 : 고려의 역사 67 (제6대 성종실록 1)

 

제6대 성종

성종(成宗, 960년~997년)은 고려 제6대 국왕(재위: 981년~997년)이다. 는 치(治), 는 온고(溫古), 시호성종강위장헌광효문의대왕(成宗康威章憲廣孝文懿大王). 태조의 손자이고, 대종(戴宗)과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의 아들이다. 본래의 작위는 개령군(開寧君)이었다.

 

생애

성종은 960년 대종(戴宗)과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969년 아버지 대종 왕욱을 여의고 개령군(開寧君)을 세습하였으며 어머니 선의왕후 유씨마저 여의어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 길러졌다.

 

981년(경종 6년) 경종이 위독하자 내선(內禪)으로 왕위에 올랐다. 본래 전왕이자 사촌형인 경종은 성종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와의 사이에서 이미 2살 된 아들 왕송(王訟, 후일 목종)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가 없었기에 대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성종은 조카 왕송(王訟)을 개령군(開寧君)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길렀다.

 

체제 정비

982년(성종 1년) 경관(京官) 5품 이상으로 하여금 봉사(封事)를 올리도록 하여 정치의 득실을 논하게 했다. 이에 참여한 최승로유학자의 자문·건의로 신정(新政)을 단행하고, 고려 초창기의 제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했으며, 유교를 국가의 지도원리로 삼고 중앙 집권적인 봉건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해에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백관(百官)의 칭호를 개정하였고, 983년(성종 2년) 3성(省)·6관을 두었으며, 서무를 분장(分掌)한 7시(寺)를 설치하는 등 중앙 관제를 제정하였다.

 

또 언론(言論)을 맡은 사헌부(司憲府), 군국(軍國)의 기밀기관인 중추원(中樞院) 등을 두었다. 한편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지방에는 처음에 12목(牧)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팔관회, 연등회를 폐지하고 왕의 내리는 명령인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로 낮추는 등 북송에 사대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대군이 고려로 침략하자 친히 안북부(안주)까지 나아갔다. 이후 서희를 적진에 보내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또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넓혔다.

 

995년(성종 14년) 잠시 중단된 개혁을 재개하여, 6관(官)을 상서 6부(尙書六部)로 하는 등 관제를 개편하였으며, 지방 행정 구역을 10도(道)·12주(州)로 나누어 다스렸고,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백부 광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과거제도를 강화, 장려하였고,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하여 팔관회 등 불교 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서울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학문과 농업을 장려하였다.

 

밖으로는 993년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동북·서북 지방에 특히 유의했다.

997년 음력 10월에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開寧君) 왕송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능은 개성의 강릉(康陵)이다.

 

가계

  • 문화왕후 김씨(文和王后)
    • 딸: 원정왕후(元貞王后) - 고려 현종의 1비
  •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 연창궁부인)
    • 딸: 원화왕후(元和王后) - 고려 현종의 2비

 

 

 

 

제6대 성종실록

(960~997, 재위 981년 7월~997년 10월, 16년 3개월)

 

1. 유학 정치이념의 실현자 성종과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

 

유학적 소양을 갖춘 성종이 집권하면서 고려는 유교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대대적인 체제 정비작업에 돌입한다. 훙효사상을 강조하고 계급질서 확립에 주력함으로써 무반과 문반으로 이뤄진 양반사회와 농.공.상으로 이뤄진 평민사회, 노비와 천민으로 이뤄진 천민사회의 구분이 명확해진다.

 

이 같은 유교정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완성하는 데 지대한 역활을 한다. 3성 6부제 도입으로 중앙관제의 기강을 확립하고 12목을 설치하여 지방 조직 정비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각 지방에 유학 교육기관을 세워 백성의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다.

 

성종의 유교정책은 결과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형태를 띠게 되어 연등화와 팔관회 등의 불교 행사들이 폐지되고, 사회 전반에 유학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성종은 960년(광종 11년)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대종 욱과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유씨 소생 선의왕후 유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치, 자는 온고이다. 981년 7월 죽음이 임박해진 경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6대 왕에 올랐으며, 이 때 그의 나이가 22세였다.

 

성종은 어머니 선의 왕후가 일찍 죽어 할머니 신정왕후 황보씨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유학에 밝고 인품이 뛰어나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광종 이후 유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명성에 걸맞게 즉위와 동시에 팔관회를 폐지하는 등 숭유억불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새로운 통치체제를 구현하는 데 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