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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95 : 고려의 역사 63 (제5대 경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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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95 : 고려의 역사 63 (제5대 경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1. 7. 10. 10:37

 

 

 

한국의 역사 295 : 고려의 역사 63 (제5대 경종실록 1)

 

제5대 경종

경종(景宗, 955년~981년)은 고려 제5대 국왕(재위: 975년~981년)이다. 는 주(胄), 는 장민(長民), 정식 시호경종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景宗至仁成穆明惠獻和大王)이다. 광종과 대목황후(大穆皇后) 황보씨(皇甫氏)의 맏아들이다.

 

생애

광종이 강력히 추진하였던 호족세력 숙청의 폭풍속에서 부왕 광종과의 관계마저 좋지 못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975년 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초반에는 광종 당시 수감되었던 정치범을 석방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의 죄를 씻어주었으면서도 광종의 치적을 부정하는 주장에는 단호하게 대응하였다. 또한 보복법이라는 것을 제정하여 모함을 당한 사람들이 무고자를 찾아 고발하거나 처벌하는 제도를 신설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태조의 서자이자 유력 왕위 계승자였던 효성태자원녕태자가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후 경종은 보복법을 취소하였다.

 

부왕 광종 생존 당시 광종의 명에 의해 헌애왕후 황보씨(獻哀王太后),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王太后) 자매와 결혼하였고 헌애왕후로부터는 아들 목종을 얻었다. 이어 광종의 명으로 다시 신라 경순왕의 딸 헌숙왕후 김씨(獻肅王后)와 결혼하였다. 즉위 후 장인인 신라 경순왕의 작위를 공으로 높이고 식읍을 하사하였으며 사후 왕으로 추봉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정사를 멀리 하고 오락과 음탕한 생활에 빠져 지냈다. 981년 음력 7월 병세가 위독해지자 어린 아들을 세우면 지위가 찬탈당할 것을 우려하여 사촌동생이며 매제이자 처남인 개령군 왕치(王治, 성종)에게 양위하였으며 같은 해에 병사하였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위치한 영릉(榮陵)이다.

 

업적

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여 고려의 토지제도의 시초를 마련하였다. 송나라와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여 사신의 내왕이 잦았다.

 

가계

  • 헌숙왕후 김씨(獻肅王后, 생몰년 미상) - 경순왕낙랑공주 왕씨의 딸로 추정.
  • 헌의왕후 유씨(獻懿王后, 생몰년 미상) - 문원대왕문혜왕후의 딸.
  • 헌애왕후 황보씨(獻哀王太后, 964~1029) -대종 욱과 선의왕후의 장녀.
    • 아들: 고려 제 7대 국왕 목종 (穆宗, 980 ~ 1009, 재위: 997 ~ 1009)
  •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王太后, ? ~ 992) - 대종 욱과 선의왕후의 차녀.
  • 대명궁부인 유씨 (大明宮夫人, 생몰년 미상) - 원장태자흥방공주의 딸.

 

 

 

 

제5대 경종실록

(955~961, 재위 975년 5월~981년 7월, 6년 2개월)

 

1. 경종의 화합정책과 호족 공신들의 재등장

 

광종이 죽자 고려 정국은 새로운 양상을띠기 시작했다. 광종 대 말기부터 서서히 힘을 회복하던 호족들이 경종 즉위와 동시에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조정의 요직들을 차지한 호족들은 가장 먼저 광종 대의 수모를 앙갚음하기 위해 복수전을 펼쳤고, 그로 인해 고려 조정엔 또 다시 피바람이 몰아친다.

 

경종은 955년 9월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주, 자는 장민이다. 965년 광종 16년 2월 11세의 나이로 왕태자, 내사, 제군사, 내의령, 정윤에 책봉되었다.

 

그가 왕태자로 책봉된 때는 이미 광종의 공포정치에 의해 많은 호족들이 희생된 상태였다. 960년에 평농서사 권신의 참소로 시작된 호족 숙청 작업이 본격화되었고, 965년에는 박수경의 세 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호족 출신 관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광종의 이 같은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호족들 중에는 왕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도모하려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 때문에 혜종의 아들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 경춘군이 역모에 휘말려 죽였다. 그리고 경종 역시 부왕의 의심 어린 눈초리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마 호족들이 광종을 제거하고 태자 주(경종)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참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태자 주는 다행히 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동생 효화태자가 어린 나이로 죽은 터라 광종에겐 태자 이외에 다른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만약 태자를 대신할 다른 왕자가 있었다면 그도 죽임을 당했을지 모른다. 당시 광종은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면 핏줄을 가리지 않고 죽였던 까닭이다.

 

이렇듯 공포와 불안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태자는 975년 5월 광종이 병으로 죽자 21세의 나이로 비로소 왕위를 넘겨받아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고려 제5대 왕 경종이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곧 대사면령을 내려 귀양 중에 있던 신하들을 모두 돌아오게 하고 갇혀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으며, 관작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작시켰다. 또한 광종대에 설치되었던 임시 감옥을 모두 헐고 신하들이 참소한 글을 불살랐다. 광종 11년 이후 15년 동안 지속되던 공포정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공포정치의 종결을 알리는 의미로 경종은 호족 출신 왕선을 집정(재상)에 임명하고 광종시대 잔재 청산 정책을 실시했다. 왕선은 성씨로 봐서는 건국 초기 왕씨 성을 하사받은 호족 세력일 것이며, 광종 11년에 쫓겨난 왕동과도 친인척관계에 있던 인물일 것이다. 이런 출신 배경을 가진 왕선을 집정으로 내세운 것은 또 한 번의 피바람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광종의 공포정치가 종결될 무렵 살아남은 호족 공신은 겨우 40여 명이었다. 수백 명에 달하던 호족 관료들은 조정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했다. 이것은 공포정치 시대에 끓임없이 이어졌던 참소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