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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93 : 고려의 역사 61 (제4대 광종실록 10) 본문
한국의 역사 293 : 고려의 역사 61 (제4대 광종실록 10)
제4대 광종실록
(925~975, 재위 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4. 광종의 무자비한 공포정치와 숙청되는 호족들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광종은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숙청하며 공포정치를 실시했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960년 광종 11년 권신의 역모에 대한 고변으로부터 광종의 공포정치는 시작됐다. 평농서사 권신은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참소했던 것이다.
당시 광종은 개경을 황도라 하고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하면서 스스로 황제의 위상을 갖추고자 하였다. 이는 곧 절대왕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대신들 중에는 광종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은 유력한 지방호족 출신으로 중앙의 고급관리였다. 준홍은 혜종 원년에 세워진 정토사의 법경대사 비문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충주의 호족이었다. 왕동은 왕씨 성을 가진 것으로 보아 태조와 의가족관계를 맺은 공신의 후손일 것이다. 따라서 왕동과 준홍은 당시 조정의 핵심 인물로 볼 수 있다.
광종은 쌍기의 등용 이래 중국 남북조 출신의 귀화인이나 후주의 관료 출신들을 파격적인 대우를 하며 끌여들였다. 노비안건법 실시 이후 호족들은 광종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 때문에 광종은 귀화인들을 이용하여 호족들을 경계하며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광종의 귀화인 중용정책과 개혁에 불만이 많았는데, 특히 대호족 출신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광종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선대 왕의 처족이거나 광종의 외가였기 때문에 왕에게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광종의 개혁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그에 따라 호족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평농서사 권신의 고변은 바로 이 때 일어났다. 고변의 내용은 준홍과 왕동이 중심이 된 일단의 무리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에 대한 세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는 왕동과 준홍이 내쫓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모죄를 저지른 그들이 죽지 않고 쫓겨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지만, 한편으로 이 사실이 왕동과 준홍의 배후 세력이 막강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들을 쫓아낼 수는 있어도 죽일 수는 없다는 존재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선대 왕들의 처족 세력이자 호족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역모에 가담한 많은 관료들은 광종의 개혁에 반기를 든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역모죄로 고변한 평농서사 권신은 과거제 도입 이후 등용된 신진 세력일 것으로 보인다. 평농서사가 어떤 일을 하는 관료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명칭으로 보아 농업과 관련된 소임을 맡고 있던 관리일 것이다. 따라서 중앙의 고급관리는 아니며 그가 조정의 중신들을 역모죄로 고변한 것으로 보아 광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일 공산이 크다. 따라서 왕동과 준홍의 역모에 대한 고변은 광종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일일 가능성이 높다.
광종은 이 일로 대부분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집과 노비, 재산을 몰수하는 등 정적에 대한 가혹한 행위와 귀화인들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인해 호족들의 불만은 더욱 높아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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