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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94 : 고려의 역사 62 (제4대 광종실록 11) 본문
한국의 역사 294 : 고려의 역사 62 (제4대 광종실록 11)
제4대 광종실록
(925~975, 재위 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4. 광종의 무자비한 공포정치와 숙청되는 호족들(계속)
서필 등 강직한 신하들과 조정에 남아 있던 일부 호족들은 광종의 지나친 처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광종은 남아 있는 호족 세력을 조정에서 완전히 몰아낼 것을 마음 먹고, 964년 여름 고려 조정은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태조 이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던 박수경 일가를 몰락시킨 사건이 그것이다. 박수경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태조의 충직한 부하였을 뿐 아니라 건국 이후에는 서경 세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의 가문은 황해도 지역의 유력한 호족인 평산 박씨를 대표하며 세 명의 후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왕식렴과 더불어 정종의 집권을 후원했고, 광종의 즉위를 적극 지원한 공로도 있었다.
그런데 박수경의 세 아들이 졸지에 역모죄로 철퇴를 맞은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들로, 큰 아들 승위는 좌승, 셋째 승례는 대상의 위치에 올라 조정 내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나 참소를 당해 죽은 것으로 보아 역모죄로 몰린 것이 분명하다. 이들도 마찬가지 광종의 개혁에 반기를 들었을 것이고 광종은 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적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공신이던 박수경은 화병에 나 죽고 말았다.
박수경 일가의 몰락 이후에도 죽음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이제 더 이상 무서을 것이 없어진 광종은 눈에 거슬리거나 반항의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신하들은 가차없이 죽음으로 몰았다. 왕족들까지도 눈 밖에 나면 가차없이 목이 달아났다. 혜종과 정종의 아들도 이 때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태자 주(경종)까지도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이 때 태자를 대신할 왕자가 있었다면 그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공포 정치 시대였다.
감옥마다 사람들이 넘쳐나서 임시 감옥을 설치해야 했고, 역모에 대한 고변이 줄을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지방의 유력한 호족가문들이었다.
광종은 그들의 반란을 두려워했고, 그 때문에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다. 그러나 광종은 자신의 총신들에 대해서는 각별한 대접을 햇다. 귀화인들이 중심이 된 개혁 세력을 위해 자주 연회도 베풀고 많은 하사품도 내렸다.
개혁을 통해 광종이 절대권력을 움켜줜 이면에는 귀화인들의 견인차 역활과 함께 호족들의 처참한 죽음과 몰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965년 강직하고 신임이 두터웠던 서필의 죽음 이후 광종은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동안 자신의 칼날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우고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러 가지 민심 안정책을 실시한다.
이에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승려 혜거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았다,. 왕이 아첨하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을 죽였으므로 내심으로 가책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 죄악을 덜기 위해 법회를 광범위하게 가지게 되니, 많은 무뢰배들이 가짜로 중이 되어 배부르게 먹을 것을 생각하고 모여들었다. 떡, 쌀, 시탄 등을 가지고 왕성과 지방의 길거리에서 일반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수없이 많았다.또 방생소를 여러 곳에 설치하여 부근 사원에서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다. 동물들을 도살하는 것을 금하고 왕궁에 쓰는 고기도 시장에서 사들였다."
이외에도 972년 광종 23년 가을에는 대사령을 내렸고, 조정에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기 위하여 972년, 973년, 974년에 지속적으로 과거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광종이 애초부터 귀화인들로 조정을 이끌어갈 생각이 없었음을 대변한다. 귀화인들을 통해 개혁을 완성한 다음 과거를 거친 새로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정을 메워 다시 귀화인들을 몰아내려고 한 것이었다.
따라서 광종 11년 이후 약 10년 동안 실시된 공포정치는 짧은 기간 내에 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희생된 호족들은 원래 광종의 지지기반이었지만, 왕권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이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광종 개혁에 대한 평가
1. 광종의 개혁을 뒷받침했던 사람들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의 광종에 대한 비판은 유교정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정치가 고려 전기 국가 안정화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광종의 개혁과정에서 많은 호족들이 희생된 것 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광종의 개혁정치는 분명히 왕권의 강화를 위한 일련의 작업들이었다. 그렇다면, 광종의 개혁정치에는 광종이라는 주체자 이외에 분명히 그 정치를 지지하고 뒷받침했던 세력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귀족세력들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까지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이 개혁작업을 뒷받침해 주었던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하나는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해 온 지식인 층들이며, 또 하나는 참신성을 지닌 신진 관료층. 또 하나는 국초이래 숭상되어 왔던 불교측 인사들로 꼽을 수 있다.
우선 광종 시대 중국은 5대 10국이라는 분열기를 맞고 있었고 이 혼란기를 틈타 많은 지식인층이 고려로 귀화해 오게 되었다. 특히, 광종조에는 후주와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이에 따른 후주 출신의 지식인 계층들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광종에게 과거제라는 획기적인 인재 등용책을 건의했던 쌍기라는 인물은 바로 이러한 지식인 계층 가운데 하나로서 그는 과거제 시행 건의 외에도 광종의 개혁정치과정에 있어서 후주의 개혁과 연계시켜 많은 조언을 함으로서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정치에 큰 힘을 불어 넣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후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광종의 개혁을 위해 대거 등용되자 후일 여러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게 되는데 최승로의 비판 또한 여기에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광종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했던 사람들로서 또한 광종대의 과거 급제자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다른 호족들과는 달리 유교경전에 기반을 둔 학문적 소양과 문학적 재능을 갖춘 관료들을 뽑는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관계로 진출한 인물들로서 광종의 재위기간에 확장시킨 문한기구와 근시기구에 참여하여 광종의 개혁작업을 뒷받침해 주었으며, 광종 자신도 재위초에 정관정요를 탐독했을 정도로 유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일부 유학자들은 이러한 광종의 전제주의적 개혁정치에 비판을 가하게 되는데, 시무 28조를 통해 역대 왕들의 치적을 분석하고 평가했던 최승로도 여기에 해당된다.
개혁작업에 참여했던 마지막 계층으로는 불교계가 있다. 이것은 당대의 명승인 균여 대사와 광종과의 협조적 관계에서 잘 알 수 있는데, 균여대사는 광종의 전제정치의 이데올로기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며, 귀법사의 창건도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려는 그의 의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광종이 불교를 깊이 믿게 된 사실에 대해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 그 죄업을 씻어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불교를 깊이 심취하여 더 적극적으로 개혁작업에 나서겠다는 정치적인 의도와도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광종 재위 26년의 개혁정치기간동안 그를 뒷받침했던 인물들은 상당히 있었고 대부분 참신성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인물들이 있었기에 광종의 개혁정치도 비록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던 것이다.
2. 광종시대의 의의
훗날 조선의 이야기이지만, 태종의 왕권 강화 작업이 세종조의 융성기로 이어지듯이, 고려 4대 임금인 광종의 왕권강화 작업과 개혁은 훗날 5대 경종과 6대 성종조의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완성으로 연결, 마무리 되었다.
고려 시대 전기의 역대 임금 가운데 비교적 긴 26년을 재위한 광종을 두고 훗날 성종조의 정치가요 학자인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즉위한 해에서 8년에 이르기까지는 정사가 맑고 밝았으며, 상벌이 남발되지 않았다는 말로서 그의 재위 초기가 상당히 훌륭했음을 극찬 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불교를 혹신함과 아울러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여 처음과 같이 하지 않았던 들 어찌 재위 26년에 수가 51에 불과 하였겠느냐면서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것은 광종의 치세가 처음에 비해 많이 흐트러졌다는 비판으로서 당시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년의 조치들과 대대적인 숙청에 대해 이 무렵의 신하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서 견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광종의 이러한 일년의 개혁 작업들은 앞으로 고려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길을 제시한 것으로서 그 의미는 사뭇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광종의 이러한 노력들이 없었다면 성종조의 유교 정치와 국가 체제 완성 작업은 훨씬 험난한 길을 걷거나 혹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개혁정치가 이미 누차에 걸처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고려 전기 국가 체제를 완성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데에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역사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참신한 인물들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이 될 수 있는 개혁이 전개되었다면, 우리 역사의 흐름은 분명 달라 졌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정리를 마친다.
3. 광종과 노무현을 비교?
일부 사람들은 노무현 고 전 대통령을 고려 광종에 비유하여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노무현을 개혁군주인 광종과 비교하기에는 재임간 뚜렸하게 개혁으로 이룬 것이 미흡하고 광종과 비교하기에는 과욕이 앞선 생각처럼 보인다. 이념투쟁으로 아까운 시간을 소모했으며 권위의 탈을 벗어나기 위한 행보도 서슴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한국 정치.사회의 개혁은 정치역량이나 지지세력이 미흡하여 구상하고 생각, 계획은 하였겠지만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사람도 결국은 부패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비극스런 죽음을 자초한 결과를 초래한 자랑스럽지 못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몇 년 전 종영된 사극 <제국의 아침>에 대하여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의 당시 인터뷰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 광종과 노무현 당선자를 비교할 수 있는지.
▲광종과 노무현 당선자는 공통점이 있다. 먼저 권력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이 같다. 광종은 강력한 호족들에 비해 왕권이 약했던 상황이고, 노무현 당선자 역시 국회는 물론 경제계 등 우리 사회의 파워집단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다.
흔히 광종이 재위 7년째부터 개혁의 칼날을 뽑은 것을 예로 들어 노 당선자도 얼마의 세월이 지나면 칼을 뽑으리라고 예상하지만 왕조체제였던 고려시대와 지금은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왕조체제에서는 비록 왕권이 약하더라도 일단 국왕이 칼을 뽑으면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삼권분립이 이루어진 현대국가는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개혁을 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미 민주화가 상당부분 진행된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의 행정권은 국회의 입법권과 사법부의 사법권에 의해 견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따라서 광종과 노 당선자는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최근 노무현 당선자의 행보를 보면, 하회탈 속에 감춘 개혁 프로젝트가 있다는 의견이 많다.
▲노무현 당선자는 자신의 개혁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선거 때와 같은 구호가 아니라 달성하고자 하는 개혁의 실체적 모습을 공개해야 한다. 현재 우리사회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직자 재산공개,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등의 개혁을 통해, 그리고 IMF외환위기시절의 기업과 금융구조조정 등을 통해 정치·사회·경제적 개혁이 이미 상당부분 진행된 상태다. 간단히 말하자면 노 당선자가 일부 법 위의 특권층을 공격함으로써 국민들을 환호하게 만들 수 있는 깜짝쇼의 많은 수단이 이미 사용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2030세대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이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노 당선자로서는 상당한 딜레마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를 냉철한 현실분석과 이성으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개혁은 오히려 수많은 갈등만 남긴 채 좌초할 공산이 있다.
* 광종의 여러 정책 중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는 당시 호족 세력을 와해시키고 왕권강화의 일환이라고 한다.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노비로 만든 양인들의 신분을 다시 양인으로 환원한 것이고, 과거제는 호족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급제라는 실력에 의해 관직에 등용하는 것으로서 노비안검법은 권력의 자의적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를 실현하려 한 것이고, 과거제는 능력에 의한 등용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이 둘은 현재도 유효한 개혁코드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통치권’ 운운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법의 지배가 아니라 권력이 지배하고 있는 면이 많다. 개인의 능력보다는 지연이나 학연, 혈연 등에 의해 등용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 이를 법의 지배, 능력에 따른 등용으로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노 당선자가 민주당 연찬회에서 “총선 후보 공천권한을 국민들에게 돌려주라”고 제시한 것은, 정치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정치를 적극적 참여의사를 지닌 국민들과 공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또한 기존의 소선거구제 개편 구상 역시 극심한 지역감정을 완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정치개혁의 일환이기는 하겠지만 현재의 극심한 지역구도는 상대방을 부정하려는 대립적 사고의 산물이란 점에서 어떤 식으로 바뀌든 그 효과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수반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 광종의 정치개혁 의미와 노무현 당선자가 추진중인 정치개혁의 의미를 비교한다면.
▲광종의 개혁은 호족들의 힘에 의한 자의적 지배를 국가의 법적, 공적 지배로 바꾸려고 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법과 제도의 정비를 통한 광종의 정치개혁이 고려왕조의 안정과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은 매우 높게 평가될만하다. 노 당선자가 추진할 우리 사회의 개혁도 법적, 공적 지배의 실현이란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혈연·지연·학연에 의한 모든 특권을 타파하고 각 개인의 가치가 높은 평가를 받는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제국의 아침>을 본 시청자들은 광종을 평가함에 있어 성군이냐 폭군이냐로 서로 엇갈리고 있는데.
▲광종은 호족들에게는 폭군이었고, 백성들에게는 성군이었다. 광종의 개혁은 단지 왕권강화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백성들을 법적, 제도적 지배의 영역으로 향상시켰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성공한 개혁으로 평가된다.
* 노무현 당선자가 역사적인 인물에서 반면교사로 배울만한 게 있다면.
▲대원군은 우리 역사에서 그 누구 못지않게 강력한 개혁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한 이유는 전체적인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당시 개방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음에도 쇄국으로 나갔던 것이 대원군의 개혁을 실패로 귀결짓게 한 근본원인이 된다.
우리 역사는 대륙과 해양으로 뻗어나갈 때 융성했고, 반도에 갇혀 티격태격할 때 쇠퇴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부개혁은 외부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행할 때 의미가 있지, 내부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국수주의적인 방향으로 나갈 때 역사는 그것을 개혁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중종에 의해 중용됐던 조광조는 개혁의 당위성만 주장했지 현실을 인정할 줄도, 상대방과 타협할 줄도 몰랐다. 결국 이같은 조급성은 정치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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