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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92 : 고려의 역사 60 (제4대 광종실록 9) 본문
한국의 역사 292 : 고려의 역사 60 (제4대 광종실록 9)
제4대 광종실록
(925~975, 재위 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3.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
공복의 제정과 절대왕권
광종은 과거제 실시 이후 2년 후인 960년, 백관의 관복제도를 제정한다. 956년에 설문우가 고려를 방문했을 때 이미 후주의 세종이 고려의 공복을 중국식으로 정비하라고 요구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이때에 비로소 관복제도가 중국식으로 바뀌면서 제도가 확립된 것이었다.
광종이 960년에 관복제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일련의 개혁정책으로 호족들의 힘이 많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시기엔 중국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광윤이 송을 일으켜 맹위를 떨치는 반면 후주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959년 후주의 시어로 있던 쌍철이 갑자기 고려로 내왕하여 고려의 신하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맹주가 사라지고 혼란이 가속화되자 광종은 스스로 황제로 군림하기를 원했다. 말하자면 중원에만 황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에도 황제가 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노비안검법을 실시한 후 과거제를 도입하여 호족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궁극적인 목적도 거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던 959년에 광종은 후주의 쌍철과 일단의 귀화인들을 조정에 끌어들인 다음 이듬해 3월 지체없이 관복제도를 확정했다. 물론 여기에는 호족들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족들은 광종에 대항할 만큼 힘이 강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관복은 신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통일전쟁과 호족들의 영향력 증대로 서열에 따른 관복제도는 확정되지 못했다. 서열이 낮아도 부유하면 좋은 옷을 입었고, 서열이 높아도 가난하면 보잘것없는 옷을 걸쳐야 했다. 이는 서열에 관계없이 재정적으로 풍부한 자가 항상 우위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광종은 이처럼 무질서한 복장이 조정의 기강을 흐트리고 왕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위에 따라 모든 공복의 색깔을 달리하게 하였다.
원윤 이상은 자삼(자색 웃옷), 중단경 이상은 단삼(붉은색 웃옷), 도항경 이상은 비삼(진홍색 웃옷), 소주부 이상은 녹상(녹색 웃옷)을 착용토록 하였다.
관복을 네 가지 색으로 구분한 것은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과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 체계의 확립을 의미한다.
관복을 제정한 광종은 곧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개칭한다. 또한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공포한다. 이는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중국의 황제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음으로써 스스로가 절대권력자임을 모든 신하들에게 주입시키려 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호족들은 광종의 절대권력에 도전하게 되고, 광종은 무자비한 숙청작업을 통한 공포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권력과 대결해 나간다. 광종 집권 후반기의 많은 호족들의 죽음은 절대왕권을 유지하려는 광종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준다.
후주
후주(後周, 951년~960년)는 오대십국 시대 중 오대(五代) 최후의 왕조로서 후한(後漢)의 실력자였던 곽위(郭威)가 건국한 나라이다. 국호는 주(周)였으나, 무왕이 세운 주와 구별하기 위해 후주라고 불렀다. 수도는 개봉(카이펑)이었다.
역사
건국자 곽위는 후한의 개국공신으로 유지원(劉知遠)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중용되었고, 유지원이 죽으면서 아들을 보필할 인물로 지명한 대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은제(隱帝)가 즉위했으나, 오히려 백부와 짜고, 고명대신들을 멀리하고 그들을 살해했다.
곽위는 마침 반란 진압을 위해 바깥에 있었기에 위험을 피했지만,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은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곽위의 반란에 놀라던 은제가 신하에게 살해되고, 곽위는 카이펑에 입성해 당시 서주에 있던 유빈(劉贇)을 새로운 황제로 앉히고, 자신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 북상했다. 하지만 파견한 부하에 의해 유빈이 노상에서 피살되었기에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새로운 왕조인 후주를 열었다.
내정 개혁
곽위는 즉위 후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954년 곽위가 죽자 그의 양자인 시영(柴栄)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오대 제일의 명군(名君)이라 일컫는 세종(世宗)이었다. 세종은 곽위의 개혁을 물려받아 내정에 힘을 기울여 국력을 충실히 하여 오랜 전란 속에 황폐해진 중원의 경제를 크게 회복시켰다. 이것을 바탕으로 군사적으로 강대해진 후주는 당나라 붕괴 후 아무도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을 목표로 원정에 나섰다.
후주의 1,2대 황제는 중국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한 황제였고, 곽위는 자신의 무덤에 석비 하나만이 있었고, 그 석비마저 새겨진 명문은 매우 간소하고, 소박했다.
통일 전쟁
시영이 즉위한 직후 북한(北漢)이 기회를 노리고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후주의 불안정한 내부사정과 후주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한 탐색전과 비슷했다. 시영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고평전투에서 북한의 군대를 격파했다. 후주의 반격에 크게 패한 북한은 이후 세력을 잃어갔다. 그 후 시영은 적극적인 원정에 나서 후촉(後蜀)을 멸망시키고, 955년~958년 세 차례에 걸쳐 친정하여 남당(南唐)을 멸망시켰다. 이것으로 후주의 판도는 장강 이북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959년 시영은 오대의 국가들의 비원이었으며, 북방의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연운십육주 탈환에 나섰다. 일련의 전투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하고 유주를 되찾은 시영은 계속 진군하려 했으나, 갑자기 병환으로 쓰러져 원정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959년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세종이 죽은 후, 7살의 시종훈(柴宗訓)이 뒤를 이었으나, 아직 어린 황제에 대해 불안을 느꼈던 군인들은 원정군의 사령관이었던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근위군 사령관)인 조광윤(趙匡胤)을 옹립했다.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개봉에 입성한 조광윤은 공제(시종훈)로부터 선양을 받아 송나라을 세웠다. 일련의 사건을 진교의 변이라 부른다.
이로써 후주는 3대 만에 멸망했으나, 조광윤은 시종훈의 보호자로 자신의 스승이었던 신문열(辛文悅)을 임명하여, 전임 황제를 살해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그러나 시종훈이 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뤄주었다. 조광윤의 유훈(遺訓)에 의해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300년간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역대 황제
- 태조 곽위(太祖 郭威), 재위 : 951년 ~ 954년)
- 세종 시영(世宗 柴栄), 재위 : 954년 ~ 959년)
- 공제 시종훈(恭帝 柴宗訓), 재위 : 959년 ~ 960년)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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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왕조 | 후량·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 |
10국 정권 | 전촉 · 후촉 · 오 · 남당 · 형남 · 오월 · 민 · 초 · 남한 · 북한 |
기타 정권 | 대연 ·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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