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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91 : 고려의 역사 59 (제4대 광종실록 8)

두바퀴인생 2011. 7. 6. 03:08

 

 

 

 

한국의 역사 291 : 고려의 역사 59 (제4대 광종실록 8)

 

 

제4대 광종실록

(925~975, 재위 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3.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

 

쌍기의 등용과 과거제(계속)

광종은 과거제를 통하여 전국에 학교가 세워지고 학풍이 일어나 문치적 관료체제가 갖춰지기를 원했는데, 계속된 과거시험으로 고려 전국에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그의 뜻이 이뤄진다.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늘어나고,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와 행동 윤리로 생각하는 유교적 관료들이 조정을 주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학문적 바탕은 단순히 광종이 과거제 도입에 의해 형성된 것만은 아니었다. 신분적 제약이 많던 신라시대에도 최치원 등의 6두품 관료들이 학문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신문왕이 국학을 설립하였고(682년),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788년) 유학을 진작시켜 놓았기에 가능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광종에 의해 과거제가 도입되지 않았다면 시험에 의해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는 쉽게 마련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과거제 시행에 핵심적인 역활을 했던 쌍기는 광종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더욱더 많은 중국인들을 귀화시켜 고려 조정으로 끌여들인다. 과거제가 실시된 이듬해인 959년에는 자신의 아버지 쌍철을 고려로 불러들였고, 광종은 쌍철을 좌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작업에 동참시킨다. 또한 쌍씨 부자가 고려의 실세로 떠오르자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로 귀화하였고 광종은 그들 대부분을 관리로 임명하였다.

 

최승로는 이 일에 대해서 강력하게 광종을 비판하고 있다. 광종의 지나친 귀화인 임용으로 내국인이 설 자리를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귀화인과 내국인의 정권대립이 가속화되는 바람에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광종이 귀화인들을 중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함으로써 내국의 호족들과는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런데 조정은 거의 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호족들을 견제할 새로운 신하들이 필요했고,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들로 그 자리를 메웠다.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중용한 나머지 광종은 내국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귀화인들에게 지급하기도 하였다. 내국 신하들은 귀화인들에 대한 광종의 지나친 대우에 반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서필이었다.  서필은 후에 거란과 담판에서 강동 6주를 되돌려 받은 서희 장군의 부친이기도 한 그는 광종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광종에게 자신의 집을 바치겠다고 했다. 광종이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자손들 대에서 어차피 집을 빼앗길 바에야 미리 집을 바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광종은 분노하지만 나중에는 서필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는 않았다고 한다.

 

광종의 공포정치는 그의 빛나는 업적인 과거제 실시마저 비판의 도마위에 올려놓고 말았는데, "재주없는 자가 부당하게 등용되고, 차례도 없이 벼슬에 뛰어올라 1년이 못되어 재상이 되곤 하였다."는 최승로의 악평이 당시 호족들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쌍기(雙冀)

 

쌍기(雙冀, ? ~ ?)는 고려의 학자이다. 본래 후주의 시대리평사 직에 있었으나, 사신단으로써 고려에 왔다가 신병으로 인해 체류하다 귀화하여 광종의 개혁에 기여하였다. (唐)의 과거임용제도를 본따 과거제를 신설할 것을 건의하였고, 과거 제도가 시행된 이후에는 시험관에 해당하는 지공거직에 임명되었다. 참고로 광종 · 경종 · 성종 대의 지공거는 주로 쌍기와 같은 귀화인인 한림학사들이 임명되었다.

 

평가

현재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광종대의 혁신적인 개혁에서의 쌍기의 역할이 과거제도에 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좀 더 광범위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이후의 학자들이 광종대의 과거제도는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쌍기를 비판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최승로(崔承老)는 광종을 평한 가운데 "쌍기를 등용한 이후로는 문사(文士)를 높이고 중히 여겨 은례(恩禮)가 지나쳤다"고 했으며, 이제현(李齊賢)도 쌍기를 "보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부화(浮華)의 문(文)을 주창하여 후세에 큰 폐단을 남겼다"고 평하고 있다.

 

사실 광종 때에 과거는 자주 실시된 것도 아니고, 또 당시 관료층 구성에 과거출신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후대에 쌍기가 비판받는 것은 그가 광종의 다른 개혁정책에도 개입하여 당시 이해관계가 달랐던 사람들과의 사이에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제도

과거(科擧)는 중국과 한국 등에서 시험을 치러서 관리를 뽑는 제도이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때, 한국에서는 고려 때 처음 시작했다.

 

 

중국의 과거

수 문제한나라 멸망 이후 400여 년간 계속 되었던 남북조 시대의 분립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중국을 재통일하였고, 새로운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를 시행하였다. 과거 제도는 지역별로 할거하고 있던 귀족 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한 것이었다. 이후 당나라 시대에 정기적인 과거가 시행되었고, 송나라에 이르러 과거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신라최치원이 당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던 것에서 보이듯 당나라는 외교관계 개선의 목적으로 주변 국가의 인재들에게 과거 시험의 응시 자격을 주기도 하였다. 원나라 시대에는 과거가 폐지되었지만, 명나라에서 부활하여 과거는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한국의 과거

 

과거 제도의 도입

788년 신라 원성왕 때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과거를 도입하였으나, 신라의 신분 제도인 골품제의 유지로 관리 발탁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려 시대의 과거

고려의 건국 세력은 신라 하대에서 후삼국 시기에 형성된 지역 유력가인 호족들이었고, 고려 건국 이후 귀족이 되었다. 이미 고려의 태조인 왕건 시기부터 귀족은 왕권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이었다.

 

본격적인 과거의 도입은 고려 광종 시기에 이루어졌다. 고려의 광종은 귀족들에 대한 견제를 위해 과거를 도입하였으나, 결국 고위 귀족의 자식들을 과거 없이 관리로 등용하는 음서를 병행하게 되었다. 고려 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신진사대부에 의해 유교적 이상에 의한 정치의 실현이 강조되었고, 모든 관리를 과거를 통해 선발하자는 주장이 거세지게 되었다.

 

고려의 과거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으로 나뉜다.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잡과는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을 시험하여 기술관을 뽑았다. 법제에서는 양인 이상은 누구나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제술과와 명경과에 응시하는 사람은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였고, 백정 농민은 주로 잡과에 응시하였다.

 

이러한 과거는 고려 사회가 이전의 고대 사회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였음을 뜻하는 한편,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인 음서로서 관리가 된 자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자보다 많았다는 사실에서 고려의 관료 체계가 귀족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공민왕 때까지, 무과를 시행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의 과거

 

조선의 과거 시험의 종류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다. 초기의 모든 합격자에게 백패라는 증명서를 지급했으나, 후에 문과 합격자와 구별하기위해 문과 합격자에게는 홍패를 지급하였다.

 

문과는 3년마다 치르는 정기시인 식년시와, 비정기시인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 순으로 초시서 각도의 인구비례에 맞게 뽑아, 복시에서 33인을 선발하고, 왕 앞에서 치르는 전시에서 순위를 결정하였다.

 

과거는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응시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문과에서는 탐관오리의 자제나 재가한 여자의 아들 그리고 서얼의 응시를 금하였다. 서얼들은 이 때문에, 청요직에는 문과 합격자만이 임용이 가능해, 정조 때 소청운동을 통해 일부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다.

 

과거의 폐단

과거에 대한 폐단은 조선 중기 이후 지속적으로 거론되었다.

 

우선 과거를 치르는 장소와 응시자의 수가 문제가 되었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학자였던 박지원은 자신의 글 <하북린과>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려니 응시한 사람만 수만 명인데 과거장에 들어갈 때부터 서로 밀치고 짓밟아 죽고 다치는 사람이 사람이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수만 명의 답안을 서너 명의 관리가 채점하다 보니 늦게 제출하는 사람의 답안은 사실상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과제를 빨리 확인하고 재빨리 답을 써 내기 위해 서너 명이 조를 짜서 전쟁 치르듯 과거 시험에 응했다고 한다. 먼저 하인들이 몸싸움을 불사하며 좋은 자리를 잡아내면(→선접꾼) 좋은 글귀로 글짓는 사람이 글을 짓고 함께온 대필가가 글씨를 써서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사실상 대리 시험이 성행했던 것이다.

 

지방 배분도 큰 문제거리의 하나였다. 서북(황해도 및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그 외 아시아의 과거

중국에서 유래된 과거는 유교와 함께 인근 지역에 전파되었다.

  •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과거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였다.
  •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에 도입되었으며, 대부분 하급 귀족이 응시하여 합격자는 중급 귀족이 되는 신분 상승이 있었다. 이 때문에 대귀족(大貴族)이라 불리던 상급 귀족은 과거를 치르지 않았으며, 귀족 사회가 계속 지속되었다. 그 뒤 무사계급(武士階級)의 등장으로 일본에서의 과거는 유명 무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