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289 : 고려의 역사 57 (제4대 광종실록 6) 본문
한국의 역사 289 : 고려의 역사 57 (제4대 광종실록 6)
제4대 광종실록
(925~975, 재위 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3.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
노비안검법과 개혁바람(계속)
노비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던 까닭에 노비의 증가는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호족들은 사노비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장정 노비와 양인 여자의 결혼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는 양천교혼(양인과 천민이 결혼하는 것)을 하락하지 않았는데,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그 자녀는 노비로 전락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성 노비와 양인 여자를 결혼시키면 노비의 숫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노린 고려 초의 호족들은 고의적으로 양천교혼을 강요하여 노비의 수를 늘리고, 이는 곧 양인의 숫자를 현격하게 줄임으로써 국방력을크게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엇다. 또한 노비는 호족들이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무력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사노비의 증가는 반란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고아종에게는 사노비의 수를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노비안검법은 노비의 증가에 의해 발생하는 이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이와 비슷한 정책이 태조 대에도 마련된 적이 있었지만 호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중도에 정책을 변경해야 했다. 이는 태조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광종은 달랐다. 광종은 이미 7년 동안 민심안정책을 통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호족들과 싸울 만한 정치적 기반도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956년 왕명으로 노비안검법이 공포되자 고려의 통일전쟁으로 포로가 되어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이 모두 양인으로 회복되었다. 노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간단했다. 노비 스스로가 자신이 과거에 양인 신분이었다는 것을 관아에 신고하기만 하면 바로 양인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양인으로 회복하는 길이 간단하게 열리자 삼국시대부터 노비로 살아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노비에서 해방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대호족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공신전을 경작하는 대가로 노비로부터 받던 세금을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었고, 사병 수도 격감하였다.
호족의 입지가 약해진 반면, 국가는 세금이 늘어나고 병졸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결과적으로 왕권이 신장되어 중앙집권적 체제 확립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일종의 노비해방법인 노비안검법의 공포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노비뿐만 아니라 노비와 같은 처지에 있던 극빈한 양인들 역시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고, 신진관료나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대호족들만이 강력하게 저항하였지만 시대적 대세와 광종의 강력한 의지 때문에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몰론 노비안검법이 가져온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노비로 있던 자가 자신의 옛주인을 헐뜯고 욕하는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사건도 잇따라 터졌고, 노비와 양인 계층의 이반으로 신분질서가 문란해져 사회적 토대가 흔들리는 양상도 일부 발생했다. 또한 광종의 근위 세력과 호족 세력 간에 충돌로 인해 정계에 대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노비안검법이 가져다 준 국가적 이익에 비하면 개혁의 과도기에 흔히 뒤따르는 '옥의 티'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옥의 티를 빌미로 호족들이 노비안검법의 철페를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경종 대에 다시 비대해진 그들의 힘에 밀려 제6대 왕 성종은 노비안검법에 따라 양인으로 회복된 대부분의 사람들을 노비로 다시 환원시키고 만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291 : 고려의 역사 59 (제4대 광종실록 8) (0) | 2011.07.06 |
---|---|
한국의 역사 290 : 고려의 역사 58 (제4대 광종실록 7) (0) | 2011.07.05 |
한국의 역사 288 : 고려의 역사 56 (제4대 광종실록 5) (0) | 2011.07.03 |
한국의 역사 287 : 고려의 역사 55 (제4대 광종실록 4) (0) | 2011.07.02 |
우면산의 여름 21: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0) | 2011.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