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290 : 고려의 역사 58 (제4대 광종실록 7)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290 : 고려의 역사 58 (제4대 광종실록 7)

두바퀴인생 2011. 7. 5. 04:01

 

 

 

한국의 역사 290 : 고려의 역사 58 (제4대 광종실록 7)

 

 

제4대 광종실록

(925~975, 재위 949년 3월~975년 5월, 26년 2개월)

 

3.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

 

쌍기의 등용과 과거제

노비안검법이 시행된 지 2년 만에 광종은 또 하나의 개혁정책을 공포한다. 두 번째 개혁정책은 '과거제' 실시였다. 노비안검법이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과거제는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시행한 정치구조 개혁안이었다. 즉 고려 건국 이후 호족 중심의 공신들에 의해 주도된 조정에 과거를 거친 신진관료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시키려는 혁명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과거제는 쌍기의 건의로 이루어진다. 쌍기는 후주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후주의 태조치하에서 절도순관, 장사랑, 시대리평사 등을 지냈다. 시대리평사는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이기 때문에 쌍기는 과거제도에 대한 지식이 많은 인물이었다. 특히 당시 후주는 건국한 지 얼마되지 않는 상황이어서 고려가 처해 있는 입장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후주의 태조는 제후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과거제를 비롯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했고, 그 결과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쌍기는 그 개혁과정에서 과거에  대한 실무를 맡았던 인물이다.

 

광종은 후주의 개혁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도 후주를 모범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에는 개혁을 추진할 인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후주 2대 왕 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고려가 951년부터 후주 연호를 사용하자 후주측은 1차로 광종을 고려 국왕에 봉하는 책봉사를 보내왔고, 다시 2차로 겸교태사로 봉하여 고려 백관들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바꾸기 위해 책봉사를 보내왔다.

 

당시 책봉사는 장작감 설문우였고, 쌍기는 그를 따라 함께 왔다. 쌍기가 설문우를 따라온 경위는 분명치 않으나 광종 쪽에서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 955년 대상 왕륭이 주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아마 광종은 이 때 주나라의 인재를 초빙하라는 밀명을 내린 듯하다. 왕륭 역시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광종의 이러한 요구에 쉽게 순응했을 것이다.

 

고려에 당도한 쌍기는 얼마 후 병에 걸려 사신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은 미리 계획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와병을 핑계하여 환국하지 않고 있다가 사신 일행이 돌아간 다음에 광종과 대면한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책봉사 일행이 돌아간 뒤에 쌍기는 병상에서 일어났고, 드디어 광종과 대면하게 된다. 쌍기를 만난 광종은 그의 개혁적인 성향과 식견에 감탄하여 후주의 세종에게 국서를 보내 쌍기를 고려의 신하로 삼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과정에서 후주 사람 쌍기는 고려 조정에 전격 등용되었다. 묘하게도 쌍기가 등용된 956년 광종 7년에 첯 번째 개혁안인 노비안검법이 공포된다. 노비안검법 마련에 쌍기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때부터 고려는 본격적으로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따라서 고려의 개혁 작업은 쌍기의 등용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쌍기는 등용 당시 전격적으로 원보의 관직에 오른다. 이 때문에 호족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광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종은 오히려 그를 다시 한림학사로 승격시켜 학문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게 한다. 그리고 958년 광종 9년에  마침내 쌍기를 지공거(과거를 주관하는 관직)로 임명하고 시, 부, 송, 책으로써 진사 갑과에 2명, 명경과에 3명, 복업과에 2명을 선발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실시한 과거시험이었으며, 최초로 진사 갑과에 합격한 사람은 최섬 외 1인이었다.

 

이 때 실시한 과거는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한 것이었다. 과거에는 문과에 제술(글 짓는 것)과 명경(유학 경전에 대한 지식을 측정하는 것)이 있었고, 그 외에 잡과로 의복(의학과 역학), 지리(음양풍수설), 율학, 서학, 산학,삼례(주례.의례.예기를 시험 과목으로 하는 것), 삼전(춘추 주해서인 좌전.공양전.곡량전을 시험 과목으로 하는 것), 하론(제목으로 글을 짓는 일종의 논술형 시험) 등이 있었다. 과거 응시자 중 이 과목들에서 등위에 든 자들에게 출신(벼슬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주게 된다.

 

처음으로 과거가 실시된 지 2년이 지난 960년에 시, 부,송만 가지고 다시 시험을 쳤고, 964년에 또 시, 부, 송 및 시무책을 가지고 시험을 보았다. 이 때 특이한 것은 시무책을 삽입한 점인데, 이는 하론의 한 형태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론에 대해서 기술하는 문제였다. 이처럼 시무책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한 사실을 통해 개혁에 걸맞는 인사에 대한 광종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966년, 972년, 973년에도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