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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97 : 고려의 역사 65 (제5대 경종실록 3) 본문
한국의 역사 297 : 고려의 역사 65 (제5대 경종실록 3)
제5대 경종실록
(955~961, 재위 975년 5월~981년 7월, 6년 2개월)
1. 경종의 화합정책과 호족 공신들의 재등장(계속)
경종이 이 같은 전시과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광종 대에 호족 공신 세력이 대거 축출되어 상대적으로 왕권이 안정되어 있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광종의 공포정치가 공신 세력을 불만 세력으로 키워놓았기 때문에 경종은 다소 타협적인 자세를 취해야 했다. 즉, 공신 세력을 끌어안고 동시에 광종 대에 성장한 신진관료들로 하여금 그들을 견제하게 하는 양면책을 구사할 필요가 있었다. 토지 분급의 기준을 관품에 한정시키지 않고 인품을 포함시킨 것도 이런 양면책의 일환이었다. 호족 세력은 원윤 이상의 자삼계층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신진관료들은 단삼계층의 실무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관품만을 분급 기준으로 삼는다면 대부분의 토지가 높은 관계에 있는 호족들의 독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인품을 분급 기준에 둠으로써 낮은 관계에 있으면서도 호족을 견제하며 주요 업무를 수행하던 신진관료들을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우집정제와 전시과를 마련하며 왕권의 안정을 노린 경종은 한동안 평화기를 지속하며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977년에는 친히 진사시를 주관하여 고응 등 여섯 사람을 급제시키고, 송과의 국교도 돈독하게 하여 사신의 내왕이 잦았다. 게다가 979년에는 발해 유민 수만 명을 받아들였고, 청새진(지금의 희천)에 성을 쌓아 변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이 고려로 왔다는 것은 곧 요를 세운 거란족이 체제를 정비하고 남하하여 여진을 압박하고 동시에 고구려 유민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실시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려가 일시에 수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안정된 상태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유배되어 있던 최지몽이 내의령에 임명되면서 고려 조정은 다시 한 번 역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혜종 재위 시절에 사천관으로 있던 최지몽은 왕규의 역모혐의를 고변한 인물로 정종과 광종의 즉위에 기여한 바 있다. 하지만 광종 재위시에 왕을 따라 귀법사에 갔다가 술에 취해 왕에게 주정을 한 죄로 외직에 나가 있다가 경종 5년에 다시 등용된 인물이다. 이 때 최지몽은 대광, 내의령 관직과 동래군후 봉작에 식읍 1천 호를 받았다.
대광으로 왕명을 다루는 내의령을 겸직하게 된 최지몽은 조정의 실세로 등장한 후 곧장 왕승 등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여 경종으로 하여금 집권 후 처음으로 역모사건을 경험케 되었다.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된 왕승은 왕족이거나, 태조로부터 왕씨 성을 부여받은 유력한 호족 출신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런데 최지몽이 그에게 역모혐의를 씌웠다는 것은 경종 집권 후 세력을 정비한 호족들이 다시금 왕권에 도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사건 이후 경종은 최지몽에게 의복과 금띠를 상으로 주게 되는데, 이는 곧 왕승이 경종의 정적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즉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시도하던 경종은 호족 세력의 견제를 받자 쫓겨났던 최지몽을 등용하여 정적들을 역도로 몰아 제거했다. 최지몽은 점성술에 능한 인물인 데다가 왕규를 제거할 때 깊숙히 관여한 바 있었기 때문에 경종은 그의 예언적 능력을 정적 제거에 이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경종은 정사를 게을리 하고 날마다 오락을 즐겼으며 여색과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는 등 방만한 생활로 일관한다. 경종이 갑자기 이같이 변해야만 했던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정치 자체에 염증을 느낀 듯하다. 왕승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호족들의 반발 또한 거세게 일었을 것이다. 광종의 공포정치 과정에서 정권싸움에 환멸을 느껴 즉위하자마자 화합정치를 표방했던 경종은 또다시 시작된 정권다툼과 살육으로 인해 허망함과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 분명하다.
경종은 정사를 뒷전으로 한 채 대신과 접촉을 피했다. 그는 시종과 놀이꾼들 이외에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981년 6월 결국 병으로 드러누웠다. 마음의 병이 깊어져 결국 육체를 망가뜨렸던 것이다.
병상에 누운 지 불과 한 달 만에 경종은 죽음이 다가옴을 예감하고 사촌동생 개령군 치를 불러서 선위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 때 경종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그의 능호는 영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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