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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73 : 고려의 역사 41 (태조실록 11)

두바퀴인생 2011. 6. 17. 02:15

 

 

 

한국의 역사 273 : 고려의 역사 41 (태조실록 11)

 

 

태조 실록(877-943년, 재위 : 918년 6월-943년 5월, 25년)

 

5. 고려 개국공신 4인방

 918년 6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핵심적인 역활을 헀던 사람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네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기병대장들이었다. 말하자면 궁예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있는 야전사령관들인 셈이었다. 태봉 건설에 중추적인 역활을 했던 이들이 반기를 들었던 것은 날로 심해가는 궁예의 비정상적인 학정 때문이었다.

 

궁예는 날로 의심이 많아지고 포악해져 측근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고, 백성들에게 가혹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눈에 거슬리는 신하들은 한결같이 역모로 몰렸고, 가혹한 공포정치에 시달린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독단과 전황을 일삼는 궁예의 공포정치가 지속되자 급기야 곳곳에서 반란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에 더 이상 궁예를 왕으로 섬길 수 없다고 판단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은 덕망이 높고 세력이 강한 왕건을 찿아가 군사를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왕건은 처음엔 역모 제의를 거절하지만 이들 네 사람과 부인 유씨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결국 역모에 동의한다. 왕건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네 사람은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왕성으로 쳐들어가 궁예를 몰아내게 된다.

 

이들 개국공신 4명의 삶을 간단하게 기록하면서 개국에서 통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역활을 추적해 본다. 

 

홍유(?~936년)

홍유는 경상도 의성 사람으로 초명은 술이다. 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언변과 논리가 뛰어 났으며, 고려 건국 당시 왕건을 설득하여 왕으로 옹립한 장본인이다.

 

태봉 이전에 그도 한때 신라의 장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신라는 진성여왕의 난정과 일부 권신들의 권력 남용으로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혼란이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혼란이 계속되자 곳곳에 민란이 일어났고, 산마다 도적들이 들끓었다. 그러자 각 지방 호족들이 봉기하여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였고, 홍유 역시 신라에 반기를 든 세력에 가담하게 된다.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홍유는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후 궁예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고구려, 마진 등으로 국호를 바꿔가며 태봉을 세웠다.

 

홍유는 17년 동안 궁예를 왕으로 섬기며 장수로서 활약하였고, 많은 공을 세워 기마부대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인 마군대장에 오른다. 하지만 궁예는 시간이 지날수록 왕으로서의 덕을 잃고 포악성을 드러내며 공포정치를 실시했고, 결국 홍유는 다시 한 번  반기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복지겸, 신숭겸, 배현경 등과 모의하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자 홍유는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등과 함께 개국 1등 공신이 된다. 고려 개국 직후 왕건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홍유는 진압군 대장으로 출전한다. 청주 반란을 수습한 이듬해 다시 경상 북부지방의 안정을 위해 예산 등지에 유민을 유치하는 일을 맡기도 했으며, 그 공적을 인정받아 종1품 대상에 오른다.

 

홍유에 대한 왕건의 믿음은 두터웠던 모양이다. 왕건은 홍유를 경상 북부지방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하고 의성의 호족장으로 대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딸을 제26비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의성부원군부인 홍씨로 왕건의 25번째 아들 의성부원대군의 어머니이다.

 

대상이라는 요직을 차지하고, 다시 왕건의 장인이 된 홍유는 명실공히 개국 1등 공신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936년 왕건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후백제의 신검을 칠 때 출전하여 일리천 전투에서 다시 한 번 공을 세우지만, 결국 그해에 그는 천수를 다하고 말았다. 그가 죽자 태조는 그에게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현경(?~936년)

배현경은 경주 사람으로, 초명은 백옥삼이다. 그는 담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운 덕분에 궁에 휘하에 있을 때 일개 병졸에서 시작하여 마군장군까지 오른 대단한 인물이다.

 

고려 건국 이후에는 개국 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승진하여 벼슬이 정1품 대관에 이르렀다.

 

과감하고 강직한 성격을 가진 그는 왕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왕건 또한 그를 신뢰하고 있던 터라 그의 직언을 곧잘 수용했다.

 

태조의 측근 중에서 청주 출신 현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태조가 그를 호족자치군을 관할하는 순군낭중(정2품)에 임명하려 하자 배현경은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배현경은 현율을 야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순군낭중에 임명할 경우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을 했다. 고려 개국 직후 청주 순군리 임춘길 등이 이미 반란을 획책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청주 출신에게 순군낭중을 내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왕건은 배현경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아끼던 측근 현율을 관리직인 병부낭중으로 고쳐 임명하게 된다.

 

이처럼 배현경은 강직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고려 개국 이후 통일 작업이 지속되면서 그는 때론 장수로서, 때로는 중앙의 감찰 관리로서 활동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재상격인 대광의 벼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도 홍유와 마찬가지로 고려가 통일을 이루던 그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배현경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간 왕건은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아, 천명이로구나. 하지만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 어찌 그대를 잊으랴!"

 

왕건이 이렇게 말한 후 그의 손을 놓고 문을 나설 때 그는 숨을 거뒀다. 그가 숨을 거두자 왕건은 국비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