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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74 : 고려의 역사 42 (태조실록 12)

두바퀴인생 2011. 6. 18. 02:03

 

 

 

한국의 역사 274 : 고려의 역사 42 (태조실록 12)

 

 

태조 실록(877-943년, 재위 : 918년 6월-943년 5월, 25년)

 

5. 고려 개국공신 4인방(계속)

  

신숭겸(?~927년)

신숭겸은 광해주(춘천) 사람으로 초명은 능산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그는 본래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으며, 신씨 성은 왕건에게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남달랐던 그는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에 올랐고, 궁예의 학정이 계속되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과 모의하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 개국에 동참한다.

 

고려 개국 후 1등공신이 된 그는 다른 공신들과 함께 고려의 국력신장과 민족통일 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927년 9월,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상 북부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갑자기 회군하여 영천을 가로질러 경주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경주를 점령하고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를 왕으로 앉혔다.

 

견훤의 경주 침략 소식을 들은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향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견훤은 경주에서 퇴각하여 돌아가고 있었다. 왕건은 별 수 없이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공산(팔공산)에 진을 쳤고, 여기서 견훤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이 전투에서 왕건의 고려군은 백제군의 역매복에 걸려 포위되었으며 거의 괴멸 직전에 신숭겸의 희생이 아니었더라면 왕건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신숭겸은 왕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왕건의 갑주를 입고 어차에 올라 적을 유인하면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그 사이 왕건은 변복을 하고 가까스로 백제군의 포위망을 빠져 나와 개경으로 돌아갔다.

 

공산 싸움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온 왕건은 부하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신의 실수를 곱씹는다. 특히 개국공신 신숭겸의 죽음은 왕건에게 큰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왕건은 신숭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시호를 '장절'이라고 했으며, 그의 동생 능길, 아들 보락, 철 등을 등용하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그의 넋을 위로 하였다. 

 

복지겸(생몰년 미상)

복지겸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가 개국 당시 신숭겸, 홍유, 배현경과 함께 왕건을 옹립하여 개국 1등공신이 되었다는 것과 면천 복씨의 시조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의 초명은 사귀 또는 사괴라고 전하고 있으며, 고려 개국 이후에는 주로 감찰일을 맡아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초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반란을 차단하는 역활을 하였던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는 환선길의 반란계획도 미리 알아내 왕건에게 고하였으며, 임춘길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을 때도 이를 차단하였다. 이처럼 복지겸은 주로 반란 세력을 색출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는 역활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뚜렷한 벼술을 하지 못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권력다툼으로 관직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죽은 후 그에게는 '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성종 13년에 개국공신 네 명 모두에게 태사 벼슬이 추증될 때 함께 받았고, 개국 공신 자격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