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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75 : 고려의 역사 43 (태조실록 13) 본문
한국의 역사 275 : 고려의 역사 43 (태조실록 13)
태조 실록(877-943년, 재위 : 918년 6월-943년 5월, 25년)
6. 태조의 정략결혼과 고려 통일을 뒷받침한 주요 호족들
건국 당시의 고려는 호족연합체였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국호를 고려로 고친 후 왕위에 오르지만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철원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궁예의 잔존 세력과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고 있던 충청도와 경상 북부지역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까닭이다. 때문에 왕건은 어떤 방법으로든 이들과 공조해야 했고, 그 결과물이 호족연합체였다.
왕건의 지지기반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와 황주 중심의 황해도, 그리고 나주와 충주 지역이었다. 개성은 자신의 출신지였고, 황주나 나주, 충주는 정벌과정에서 형성한 주요 거점이었다.
그리고 이 네 지역은 그의 처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제1비 신혜왕후가 경기도 정주의 호족 유천궁의 딸이었고, 제2비 장화왕후가 전라도 나주의 오다련 딸이었으며, 제3비 신명순왕후는 충주의 유력가 유긍달의 딸이었다. 또한 제4비 신정왕후는 황주를 대표하는 황보씨 가문의 제공의 딸이었으며, 제6비 정덕왕후는 경기도 정주 호족 유덕영의 딸이었다.
이들 중 첯째 부인 신혜왕후와 둘째 부인 장화왕후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과 왕건이 결혼한 시기는 920년 이전이다. 이는 고려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왕건이 이미 고려 건국 이전부터 꾸준히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예가 한때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두었던 이유도 바로 왕건의 이같은 세력 팽창 노력 때문일 것이다.
이는 궁예가 쉽사리 왕건을 제거하지 못했던 것이 왕건 지지세력의 반란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왕건이 반란을 일으키자 궁예가 별다른 저항 없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왕건의 세력이 얼마나 커져 있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왕건의 세력은 경기도, 황해도, 나주, 청주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 건국 후 궁예의 잔존 세력과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고 있던 충청도, 경상 북부 호족들의 반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왕건은 철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궁예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흔암을 죽이고, 충청도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청주 성주 공직의 처남 경종과 무력 동원 능력이 있던 환선길 형제를 죽여 반발 세력의 기선을 제압했다.
왕건은 이처럼 강경책과 함께 유화책을 구사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결혼정책이다. 각 지방의 호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관계를 돈독히하여 고려의 안정으로 노리겠다는 계산이었다.
다행히도 왕건의 결혼정책은 지방 호족들을 안심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하지만 호족들은 여전히 자기 지방 치안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정책이 중앙집권화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왕건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호족연합체 국가뿐이었다.
호족연합체는 일종의 지방자치제 성격을 띠었다. 각 지역의 호족들이 자기 지방의 호장, 부호장이 되어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고, 중앙 정부는 그들 호족들을 하나의 국가체제로 결속시키는 역활을 했던 것이다.
이들 호족 세력은 고려 개국과 그 이후에 지속된 통일정책 과정에서 왕건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인척지간이 되었고, 그 결과 왕건은 전국 주요 지역에서 29명의 후비들을 얻게 된 것이다.
후비들의 출신 지역은 황해도가 9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도 4명, 충청도 3명, 강원도 3명, 전라도 2명, 경상도 6명, 출신이 불분명한 나머지 2명 등이다.
황해도 출신 후비가 절대 다수였다는 것은 고려 건국에 황해도 호족들의 역활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며 상대적으로 경기도 출신 후비가 적은 것은 왕건의 힘이 경기 지역을 아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황해도에 이어 경상도 출신 후비가 두 번째로 많은 것은 신라 세력에 대한 배려이자 동시에 견제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라도 출신 후비가 두 명뿐이었던 것은 왕건이 일찍이 나주 지역을 고려에 귀속시켜 전라도의 인심을 얻었고, 또한 후백제를 몰락시키는 과정에서 견훤과 그의 사위 박영규의 동조를 얻어냈기 때문에 다른 호족들과 제휴가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한편으로 전라도 지역이 완전히 견훤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내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후비를 배출한 각 지역의 호족들을 살펴보면 우선 황해도에는 제4비 신정왕후의 아버지 황보제공을 비롯하여 제25, 27, 28비의 아버지 박수경과 제9비 동양원부인 유씨의 아버지 유금필이 있고, 경기도에는 제1비 신혜왕후의 아버지 유천궁과 제15, 16비의 아버지 왕규가 있다.
충청도에는 제3비 신명순왕후의 유긍달, 강원도에는 제8비 정목부인의 아버지 왕경을 비록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예와 왕유, 경상도에는 제5비 신성왕후의 아버지이자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과 제26비 의성부원부인 홍씨의 아버지 홍유, 전라도에는 제2비 정화왕후의 아버지 오다련군과 견훤의 사위이자 제17비 동산원부인 박씨의 아버지 박영규가 있다.
이들 중 왕후를 배출한 호족들을 제외하면 황해도에는 박수경과 유금필, 경기도에는 왕규, 강원도에는 왕경, 경상도에서는 홍유, 전라도에서는 박영규 등이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각 지역 대표하는 이들 호족 세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황해도를 대표하는 박수경과 유금필은 통일에 핵심적인 역활을 한 무장 세력이다. 특히 박수경은 자신의 누이와 질녀, 그리고 딸을 각각 태조의 25비, 28비에 앉혀 한 집안에서 3명의 후비를 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왕규는 단 한 번도 전장에 출전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박수경이나 유금필과 달리 학식을 겸비한 문장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임종을 앞둔 태조를 보필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혜종 집권기에 서경파와 정권을 다퉜던 점을 보면 경기 일대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강원도의 왕씨 일가는 명주(강릉) 성주 왕순식의 친척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신라에 속했던 왕순식(원래 성은 김씨)은 태조 5년에 고려에 내응한 공로로 태조로부터 왕씨 성을 받고 대광에 오른 인물이다. 제8비의 아버지 왕경과 제14비의 아버지 왕예, 18비의 아버지 왕유(원래 성은 박씨)도 이 때 태조로부터 왕씨 성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경상도 홍유는 이미 언급했듯이 고려 개국 4대 공신 중 한 명으로 경상북부 지역의 유력가로 성장했다.
전라도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로 호남 지역의 유력가였다. 박영규는 자신의 첯딸을 태조의 제17비로 보내고, 다시 둘째, 셋째 딸을 왕자 시절 정종의 배필로 보냄으로써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인물이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체로 경애왕과 관련된 신라 왕족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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