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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71 : 고려의 역사 39 (태조실록 9) 본문
한국의 역사 271 : 고려의 역사 39 (태조실록 9)
태조 실록(877-943년, 재위 : 918년 6월-943년 5월, 25년)
4. 태조 왕건의 가족들
왕건은 신혜왕후 유(柳)씨를 비롯한 총 29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25남 9녀를 얻었다. 29명의 부인들 중에서 제2비 장화왕후 오씨가 1남(혜종), 제3비 신명순왕후 유(柳)씨가 정종과 광종을 비롯한 5남 2녀,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가 1남 1녀, 제5비 신성왕후 김씨가 1남, 제6비 정덕왕후 유(柳)씨가 4남 3녀, 헌목대부인 평씨가 1남, 정목부인 왕씨가 1녀, 동양원부인 유(庾)씨가 2남, 숙목부인 왕씨가 1남, 성무부인 박씨가 4남 1녀, 의성부원부인 홍씨가 1남을 낳았다. 이외에 정비 신혜왕후 유씨를 비롯하여 나머지 12명의 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들 중 신혜왕후 유씨를 비롯한 여섯 왕비와 그들에게서 태어난 왕자들 중 후대 왕권 구도와 관련 있는 대종과 안종의 삶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혜종, 정종, 광종은 각 실록에서 다룬다.
신혜왕후 유(柳)씨 (생몰년 미상)
태조의 본부인 유씨는 경기도 정주(풍덕)에서 태어났으며, 삼중대광 유천궁의 딸이다.
유천궁은 경기 북부 지역의 큰 부자였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의 집안을 일컬어 '어른댁(長者家)'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태조가 그녀를 만난 시기는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군대를 거느리고 각 지역을 정벌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 시기가 896년이고, 왕건의 나이 스무 살이었으므로 장수로 활약할 만큼 성장한 때였다. 하지만 유천궁이 경기 지역의 유력가인점을 고려한다면 아직 초적의 무리로 인식되고 있던 궁예 휘하의 장수에게 딸을 내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왕건이 유씨를 만난 시기는 궁예가 정식으로 후고구려를 세운 901년 전후가 될 것이다.
이 때 유씨의 나이는 당시 결혼 적령기인 열여덟 살쯤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계산해 볼 때 유씨는 왕건보다 다섯에서 일곱 살 정도 아래였을 것이므로 882년에서 884년 사이에 태어났을 듯싶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그녀를 늙은 버드나무 아래서 만났다고 되어 있다.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 땅을 지나가다가 말을 쉬게 하고 버드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 시냇가에 있던 유씨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그녀에게 말을 건넨 왕건은 그녀의 덕스러운 얼굴에 반해 그날 유천궁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유천궁은 그날 밤 자신의 딸 유씨를 왕건과 동침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건이 버드나무 아래서 쉬다가 개천가에 있는 유씨를 발견했다는 말은 꾸며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일반적인 결혼 관념에 따르면 물근처에서 여자를 만나는 것은 다산을 상징하고, 또한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치부했다. 따라서 왕건과 유천궁의 이야기도 이런 일반적인 결혼 관념에 끼워 맞춘 흔적이 역력하다.
유천궁은 경기 지역 대부호였다. 때문에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뛰어난 장수를 사위로 돌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왕건 역시 경지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유천궁의 재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왕건이 유천궁의 사위가 된 것은 <고려사>의 이야기처럼 우연히 이뤄진 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어쨌던 유천궁은 자신의 딸을 왕건과 동침토록 했고, 왕건은 그의 집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떠났다. 왕건이 전장으로 떠난 뒤 소식이 없자 유씨는 머리를 깍고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다가 오래 뒤에 왕건이 이 사실을 알고 그녀를 데려와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유씨는 당찬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궁예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발하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대사를 도모하고자 찿아 왔을 때 왕건은 주저하였다. 이 때 유씨는 밖에서 엿듣고 있다가 왕건을 독려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유씨의 개국 공로에 대해서는 934년 후당의 명종이 태복경, 왕경 등을 보내 그녀를 하동군부인에 봉하는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글은 "국사 대책을 좋은 계책으로 보좌하였으며, 부인으로서 우대와 총애를 받았다."고 그녀를 칭찬하며 "일반적인 관례를 초월하여 특수한 명예를 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죽은 뒤 왕건의 묘에 합장되었다. 그녀의 사망 년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장화왕후 오씨(생몰년 미상)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목포 사람으로 부친은 오다련군이며 조부는 오부돈이다. <고려사>는 그녀를 미미한 가문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지는 않다.
왕건이 오씨를 만난 때는 910년 전후한 무렵이다. 이는 혜종이 912년 태생이라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 때 오씨의 나이를 당시의 결혼 적령기인 17세 정도라고 추측해보면 그녀의 출생연대는 대략 893년에서 895년 전후한 시기가 된다.
왕건과 오씨의 만남을 <고려사>는 다소 신비화 시키고 있다. 왕건이 나주에 진주하여 시냇가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떠 있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가 시냇가에 다가서니 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어 동침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왕건과 오씨의 동침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그녀를 불러서 동침하였는데, 그녀의 가문이 한미한 탓으로 임신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가 그것을 즉시 흡수하였으므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고려사>는 또 이 일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혜종의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주름살 임금'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씨의 신분이 미미한 탓에 혜종은 왕건의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 뻔했다. 왕건은 장남 무를 세자로 삼고 싶었지만 오씨의 신분이 한미한 것을 염려하여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이 때 대광을 맡고 있던 박술희의 도움으로 자신의 뜻대로 장남을 세자로 세우게 되었다.
오씨는 혜종 이외에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사망 년대에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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