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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70 : 고려의 역사 38 (태조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270 : 고려의 역사 38 (태조실록 8)
태조 실록(877-943년, 재위 : 918년 6월-943년 5월, 25년)
3. 당 왕실과 혈연관계를 조작한 고려왕실 : 계속
하지만, 고려왕조의 선조가 선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제현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논박하고 있다. 즉 선종이 비록 난리통에 동방으로 왔다는 설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민담에 불과한 것으로, 실록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제현의 주장대로라면 고려 왕실이 당의 왕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김관의 나 민지는 왜 고려 왕실을 당나라 왕족과 연관시키려 했던 것일까?
김관의 나 민지의 주장을 고려 왕실에서도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해보면 그 의도는 좀 더 분명해진다. 고려 왕실은 당 왕실과 자신들을 혈연으로 묶어 우선적으로 고려 왕실의 위신을 새롭게 하고, 다음으로 외교적으로 고려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고려 건국 당시 중국 정세를 살펴보면, 907년 당이 멸망하자 5대 10국인 후당, 후량, 후진, 후한, 후주 등 5대와 오, 오월, 남한, 초, 전촉, 민, 형남.남평, 후촉, 남당, 북한 등 10개국이 난립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백성들은 3백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당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의 당에 대한 그리움은 송.원대에 가서도 지속되는데, 고려는 중국인의 이같은 정서를 국내 정세의 안정과 중국 국가들과의 외교에 이용하려 했던 것 같다.
당이 멸망하자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했지만, 당의 문화와 전통은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이 당 왕실과 혈연관계에 있다는 것은 외교적 측면에서 유리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고려 왕실은 이러한 이점을 계산하고 의도적으로 당 왕실과 혈연관계를 조작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김관의의 <편년통록>과 민지의 <편년강목>이 원나라 세력이 팽창된 이후에 저작된 사실을 고려한다면 고려 왕실과 당 왕실을 혈연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고려 말엽에 와서 이루어진 일일 가능성이 크다. 원의 팽창으로 송의 입지가 약해지고, 결과적으로 송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고려 왕실의 입지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고려 왕실은 왕족의 권위를 세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고, 그 결과 당 왕실과 혈연관계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고려 중엽 당시에는 이러한 혈연 조작이 여러모로 쓸모 있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양왕 대 이후 반원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고려는 더 이상 당 왕실과 혈연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원의 몰락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중국의 정세를 틈타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려는 당 왕실과 혈연 조작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이 고려 왕실과 당 왕실의 혈연 조작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관의와 민지의 주장에 대한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그들의 기록은 왕건의 조상들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우선 왕건의 조상들은 송악산 아래 터전을 잡은 것으로, 증조모 진의의 사생아 작제건이 조부이며, 조모는 용녀라는 것과, 또한 왕건의 아버지의 이름이 용건(왕륭)이며, 어머니는 몽녀 한씨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려사>는 고려 태조실록에도 이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운 후, 왕의 3대 조상들은 왕으로 추존되었는데, 증조부는 원덕대왕, 증조모 진의를 정황왕후라 했고, 조부 작제건은 의조 경강대왕, 조모 용녀는 원창왕후에 봉했다. 그리고 아버지 용건은 세조 위무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몽녀는 위숙왕후에 봉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증조모의 아버지 보육을 국조라고 하면서 원덕대왕에 봉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부계 혈통을 유지하던 관습에 비추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만약 보육이 자신의 딸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다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당시엔 족내혼이 성행했고 보육 역시 질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치면 딸을 아내로 삼는 경우도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은 <태조실록>에서 보육을 국조(증조부)로 하고, 그의 딸이자 증조모인 진의를 국조의 왕후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육이 증조모 진의의 아버지이자 동시에 남편이었을 때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풍습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추론은 사실로 인정되기 힘들다. 오히려 보육의 딸 진의가 사생아를 낳자, 보육이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왕건의 이같은 조상들에 대한 기록은 좀 의문이 많다. 조작했다고 하지만 당 왕실과 연계한 점, 왕씨 성을 받게 되었다는 점, 족내혼으로 혈통이 혼란스럽고 기록도 자세하게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사생아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버지 왕륭이 무역 등을 통해 경제적으로 운좋게 부유해진 집안이 되었으며 그 재력으로 궁예의 반란군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게 되면서 합류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왕씨 성도 돈을 주고 샀거나 하사받은 게 아닐까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집안 내력이 좀 불투명하고 모호한 점이 한 나라의 창업 주인으로 그 집안에 대한 많은 기록과 당시 상황에 맞는 내용으로 전해지지 않았고, 또 조정의 수많은 학자들이 조사하고 연구하여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을 것인바, 자세한 집안 내력이 없고 조작되었다는 사실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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