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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53 : 고려의 역사 21 (후삼국 실록 14)

두바퀴인생 2011. 5. 28. 11:38

 

 

 

한국의 역사 253 : 고려의 역사 21 (후삼국 실록 14)

 

신검의 왕위 찬탈과 백제의 몰락

  

운주에서 대패하고, 나주까지 고려에 빼앗긴 백제 조정은 935년 무렵부터 심한 내분을 겪는다. 견훤은 이미 69세의 노인이었지만, 아직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견훤은 10여 명의 아내에게서 여러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 중에서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총애하고 있었다. 그는 내심 금강에게 왕위를 무렬주고자 했지만, 주변의 반대가 심해 금강을 태자로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운주전투에서 물러난 후에야 자신이 이미 늙었음을 절감하고 금강에게 양위하려 했다.

 

 

                                                 

 

 

하지만 금강의 왕위 계승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는 첯째 신검이었고, 많은 신하들이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그럼에도 견훤은 금강을 태자로 지명했다. 신검을 위시한 반대파 세력은 935년3월에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버렸다.

 

반정을 주도한 인물은 이찬 능환이었다. 당시 견훤의 2남 양검은 강주에 도독으로 가 있었고, 3남 용검은 무주 도독으로 가 있었다. 능환은 이들 둘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반군을 형성하였고, 군대를 이끌고 완산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의 반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견훤은 창졸지간에 들어닥친 반란군에 의해 붙잡혀 금산사에 갇혔고, 금강은 죽임을 당하였다.

 

사건의 전후 관계로 볼 때 신검과 금강은 배다른 형제였다. 신검은 적출로 장자이고, 금강은 서자인 셈이었다. 즉, 견훤이 서자이자 이복동생인 금강을 태자에 앉히자, 적자 세력들이 대거 반발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역사에 허다한 일이지만, 견훤이라는 불세출의 늙은 영웅이 이불속에서 여자의 속삭질에 넘어가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일생일대의 실책을 저질러버린 셈이 되었다. 

 

그런데 반정을 주도한 사람은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술사로 나오는 능환이었다. 이 능환이라는 인물은 어떤 세력일까? 단순히 신검을 왕위에 앉히기 위한 신검의 수족일까? 후에 고려에 의해 백제가 무너진 뒤에 그가 반정의 주동으로 지목되어 사형당하는 것을 감안할 때, 그는 단순한 신검의 부하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왕위를 탐내고 있던 신검 못지않게 적자의 즉위를 갈망하는 세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신검의 외가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말하자면 능환은 견훤의 외척 중 한 사람일 것이며, 그것도 견훤의 첯부인과 형제관계에 있는 인물일 것이다.

 

견훤은 원래 상주 사람인데,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백제를 세웠다. 농경사회가 타지인에 대한 배척이 매우 심한 것을 감안할때, 상주 출신의 견훤이 완산에 도읍하여 백제를 재건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역의 호족 세력이 호응하지 않았다면, 견훤의 백제 건국은 심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견훤의 부인이 여러 명인 것은 그들 호족 세력의 저항을 무마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왕건이 그랬듯이 호족들과 친족관계를 맺고, 혈연을 기반으로 국가를 안정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신검과 금강이 부딪힘은 바로 그런 호족들 간의 세력다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견훤이 완산에 도읍을 정했다면, 신검의 어머니는 완산의 힘있는 호족 출신일 것이며, 능환 역시 마찬가지다. 즉 견훤이 지지기반이 약한 금강을 태자로 세우자, 조정을 상당수 장악하고 있던 완산의 호족들이 반정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신검을 왕위에 세운 것이 신검 반정의 실체라는 것이다.

 

능환과 함께 거사에 동참했던 신덕, 영순, 흔강, 부달, 우봉, 견달 등 40여 명의 반정 주도 세력은 모두 완산의 호족 출신이며, 견훤은 그들의 반대로 금강을 태자로 세우지 못하다가 만년에 독단적으로 금강을 태자로 삼았다가 반정의 화를 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검이 반정 이후에 견훤의 측근과 금강의 비호 세력들을 대거 척살했다.

 

한편,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그해 6월에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했다. 왕건은 견훤의 귀순 소식을 접하고 날뜻이 기뻐하며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고, 그를 상부(尙父)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고, 그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은 대세가 왕건에게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자신도 고려에 투항할 뜻을 비쳤다.

 

그런 가운데 신검은 그해 10월 왕위에 오른다. 반정을 일으킨 지 무려 8개월이나 지나서였다. 그가 즉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만큼 저항 세력이 많았다는 뜻이다. 8게월이라는 기간은 그들을 무마하거나 척살하는 데 소요된 세월인 것이다.

 

신검이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달에 신라 경순왕은 스스로 신하들을 이끌고 개성으로 가서 왕건에게 투항했다. 대세는 그렇게 왕건에게 기울어지고 있었고, 신검 정권은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했는데, 이는 신검이 자기 세력이라고 규정한 친척들에게 조차 호응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건은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936년 9월에 8만 7천의 군사를 이끌고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선다. 이 대열에는 물론 견훤도 합류했다.

 

출병한 왕건의 군사를 세분해보면 고려군 4만 3천, 지방 호족 및 발해유민으로 구성된 연합군 4만 4천 명으로 명실공히 민족 연합군이었다.

 

그려 연합군과 신검 부대가 처음 싸운 곳은 일선(경북 선산)이었다. 이곳에서 신검은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완산주로 퇴각하여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백제군이 견훤에게 항복하여 싸움을 포기하는 가운데, 연합군이 추격을 게속하여 황산(논산)의 탄령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신검은 항복하기로 결심하고 사신을 보내 의사를 전하자, 왕건이 완산주로 가서 정식으로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약 50년에 걸친 후삼국시대는 종막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