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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54 : 고려의 역사 22 (후삼국 실록 15)

두바퀴인생 2011. 5. 29. 08:20

 

 

 

한국의 역사 254 : 고려의 역사 22 (후삼국 실록 15)

 

후삼국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후삼국시대는 한국 역사의 유일한 전국 시대이자, 잊혀진 영웅시대이다. 약 50년 동안 숱한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웅들이 명멸해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기록을 얻지 못했다. 심지어 나라를 세운 궁예와 견훤에 대한 기록조차 변변치 못한 처지다. 그런 까닭에 고려측 인물들, 그것도 극히 일부에 한해서만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현실 탓에 백제나 태봉의 인물들의 면면을 여기에 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궁예, 견훤, 왕건, 유금필 네 사람의 생을 개인의 태생과 성장, 성격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한다. 궁예, 견훤, 왕건은 나라를 세워 후삼국시대를 엮어간 인물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다뤘고, 유금필은 당대 최고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택했다. 고려 개국 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에 관한 기록은 태조 실록에 따로 실었다.

 

 

 

비운의 혁명가 궁예(857~918년)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가 거듭 들어 잇는 날(重午)에 태어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에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사람을 보내 그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것은 궁예의 출생과 관련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 내용으로는 궁예의 태생 연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918년 3월에 왕창근이 궁예에게 바친 청동거울에 새겨진 글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사유에서 기필코 축을 멸하리니 바다를 건너와 융성할 유를 반드시 기다려라'

 

이 글은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내용상 축(丑)은 궁예를 지칭하고, 유(酉)는 왕건을 지칭했다. 왕건은 정유년 닭띠 태생이기 때문이었고, 궁예는 축년, 즉 소띠라는 의미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궁예는 태어날 당시 아버지가 이미 왕의 신분이었다. 그가 제47대 헌안왕(재위 857~861)의 아들이 확실하다면, 궁예는 헌안왕 재위 년간에 태어났다. 헌안왕 재위 기간 중 축년은 857년 뿐이므로, 그는 857년 5월 5일에 태어난 것이 된다.

 

그런데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하는 운명의 불운한 몸이었다. 단오날 같이 양기가 겹친 날에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데다가 나면서부터 이가 있고, 지붕 위에 상서로운 광염마져 생겼다는 것이 그가 죽어야 하는 이유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아이를 죽여야 하는 이유치고는 너무나 설득력이 없다. 양기가 겹친 날에 아이가 태어났다면 의당 그것은 좋은 징조요, 지붕 위에 상서로운 기운마저 볃쳤다면 그것 역시 나쁠 것이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때까지 헌안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둘 있었다. 한마디로 양기가 겹친 날에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후계자를 얻었는데, 일관의 말 한마디에 자식을 죽일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이 의문은 헌안왕에 이어 경문왕(재위 861~875년)이 즉위하는 사실에서 찿아야 한다. 경문왕은 희강왕의 아들인 아찬 계명의 아들이다. 희강왕의 이름은 제륭으로 그가 왕위에 오늘 때 왕위 계승다툼이 있었는데, 그 정적이 조카인 균정이다. 제륭은 계승권을 다투던 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신라 왕실은 혈육 간에 혈전을 치렀다. 제륭은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김명(민애왕)에게 쫓겨나고, 김명은 균정의 아들 우징(신무왕)에게 죽었다. 헌안왕은 우징의 이복동생이므로 헌안왕 또한 균정의 아들이다. 균정이 경문왕의 할아버지에게 목숨을 잃었기에, 헌안왕과 경문왕은 원수지간인 셈이다.

 

그런데 헌안왕은 경문왕을 사위로 맞아들였고, 또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말하자면 원수의 자식을 사위로 맞아들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 셈이다. 경문왕이 즉위하면 균정 계열의 정치 세력이 대거 척결당할 건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인데, 헌안왕은 왜 그런 경문왕을 사위로 삼고 왕위까지 물려주었을까? 더구나 멀쩡하게 태어난 아들까지 죽이면서 그런 엉뚱한 짓을 한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엔 뭔가 정치적인 결탁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즉 헌안왕에겐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손자를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헌안왕은 조카인 문성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문성왕의 후손임을 감안할 때 문성왕에겐 분명 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이미 늙은 이복삼촌인 헌안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은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헌안왕이 왕위를 가로챘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헌안왕은 왕위를 가로채는 과정에서 경문왕 집안과 결탁하였을 것이다. 헌안왕의 어머니는 민애왕과 남매지간이고, 김명은 제륭(희강왕)을 맏들어 왕위에 올렸다가 그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리고 민애왕은 헌안왕의 이복형인 신무왕(우징)에게 죽었기 때문에 신무왕은 헌안왕 모계 쪽의 원수인 셈이다. 당시 신라 사회가 모계 쪽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사실에 근거할 때, 헌안왕과 신무왕은 결코 사이가 좋았을리 없었다. 헌안왕은 이렇듯 묘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가로채는 과정에서 경문왕 집안과 결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헌안왕과 경문왕 집안 사이에 정치적 결탁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경문왕 세력은 헌안왕의 즉위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다음 왕위를 보장받은 것은 아닐까?

 

헌안왕이 자신의 씨를 받고 태어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쩌면 경문왕 집안과의 약속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음 왕을 경문왕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그를 사위로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뒤늦게 후궁의 몸에서, 그것도 5월 5일 길일에 때아닌 구름 띠와 함께 상서로운 조짐을 보이면서 후계자가 태어난 것이다.

 

그 아이는 왕위를 넘겨 받기로 한 경문왕 집안에 대단히 위험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헌안왕은 아들이 태어났다는데도 직접 찿아보지도 않았다. 단지 일관의 말만 듣고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는 아들이 태어나는 경우에는 죽이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거나, 그와 유사한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런 추론을 바탕으로 궁예는 단지 정치적인 희생양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죽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 꺼내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젖 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아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이 때문에 그는 한쪽 눈이 멀었다."

 

이 대목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헌안왕이 결코 아이를 죽일 생각이 없었음을 알수 있다. 아이를 죽이는데 굳이 다락 밑으로 던져 죽여야할 필연성도 없었고, 그 아래 유모가 아이를 받기 위해 몰래 숨어 있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가 물건이 아닌 바에야 은밀히 숨어 있다가 던지는 사람 몰래 밑에서 받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조작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더구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인데, 친모도 아닌 유모가 그런 무모한 모험을 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이 기록에서 아이를 죽이는 척하고 유모로 하여금 몰래 빼돌린 흔적이 역력하다. 비록 정치적 결탁에 의해 아이를 왕자로 키우지 못할 망정 아비된 자로서 차마 아들을 죽일 수 없어 헌안왕은 유모를 시켜 아이의 목숨만이라도 보전케 했던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