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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52 : 고려의 역사 20 (후삼국 실록 13) 본문
한국의 역사 252 : 고려의 역사 20 (후삼국 실록 13)
국운을 건 명승부들
운주전투
-견훤, 양팔을 잃고 허탈감에 빠지다-
934년 9월, 왕건은 해상전에서 당한 수모를 설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충남 홍성) 정벌에 나섰다. 운주는 궁예시대에는 태봉의 땅이었으나 왕건이 반정을 일으키자 그에 반발하여 공주와 함께 백제로 투항한 땅이엇다.
백제는 이곳을 거점으로 932년에 당진과 아산 일대를 공략하여 지속적으로 유린해왔다. 당진과 아산은 지형상으로 해군 기지가 되기엔 충분한 곳이었고, 왕건이 만약 이곳을 잃을 경우 백제 해군의 개성 침투는 아주 손쉬워진다. 왕건이 운주정벌에 나선 것은 당진과 아산이 크게 위험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이뤄진 조치였다.
왕건이 운주로 진출하자, 견훤도 갑사 5천 명을 이끌고 달려왔다. 그러나 견훤은 굳이 왕건과 싸울 마음이 없었다. 견훤은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다.
"양군이 서로 싸우면 두 쪽 모두 온전치 못할 형세이니, 무지한 병졸들만 수없이 살상될 것이다. 화친을 맹약하고 각자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견훤의 화친 제의를 받고 왕건도 은근히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휘하 장수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묻는데, 유금필이 나서서 결전을 주장했다.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요."
결국 유금필의 주장을 받아들여 왕건은 선제 공격을 명령했다. 유금필이 정예기병 수천을 이끌고 급습을 가하자, 견훤은 그 기세와 용맹에 눌려 달아나고 말았다. 유금필이 그 뒤를 쫓아 백제군 3천을 죽이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백제의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다.
포로로 잡힌 종훈을 술사라고 표현한 점으로 미뤄, 필시 그는 백제 병력의 전술을 담당하는 견훤의 모사일테고, 의사 훈겸은 늙은 견훤의 몸을 돌보는 측근이었을 것이다. 또한 상달과 최필에게 용장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견훤이 아끼는 장수들임에 분명하다. 견훤의 지척에 있어야 할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는 것은 견훤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도망하였다는 것이다.
유금필의 대활약으로 고려군이 운주를 장악하게 되자,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그 위세에 눌려 스스로 항복해 왔다.
왕건은 이런 기세를 몰아 몇 달 뒤에는 유금필을 앞세워 나주 탈환 작전에 나선다. 나주는 이미 929년부터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나주의 일부가 산성에 의지하여 버티고 있긴 했지만, 거의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나주 탈환 작전에 대한 결과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후에 견훤이 금산사에서 갇혀 있다가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한 것으로 보아 유금필이 나주 탈환 작전은 성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듯 운주전투의 대승은 나주 탈환으로 이어졌고, 운주를 장악한 즉시, 나주 탈환을 계획하였다는 것은 운주가 고려 해군의 거점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만약 운주에 백제 수군이 머물러 있었다면 나주 탈환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건이 운주공격에 집착한 것은 바로 나주 탈환에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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