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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55 : 고려의 역사 23 (후삼국 실록 16)

두바퀴인생 2011. 5. 30. 03:30

 

 

 

한국의 역사 255 : 고려의 역사 23 (후삼국 실록 16)

 

 

비운의 혁명가 궁예(857~918년) : 계속

궁예는 이렇듯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 하지만 다락에서 받을 때 찔린 한쪽 눈은 실명되어 애꾸로 살아야 했다.

 

유모는 몰래 숨어서 살며 궁예를 키웠다. 하지만 궁예는 자라면서 다소 불량스럽고 거칠게 행동하였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유모는 궁예가 10여 세가 되었을 때, 결국 그의 진짜 신분을 알려주고 행동을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에 이르렀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출생에 대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궁예는 비밀을 간직한 채 세달사라는 절로 출가한다. 그의 출가는 불가에 몸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분이 밝혀져 경문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신분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어쨌던 궁예는 출가하여 선종이라는 법명을 얻고 장성할 때까지 스님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의 승려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계율에 구애받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며, 세상일에 관심이 많았다. 거기다 유달리 활에 집착하여 궁술이 대단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재를 올리려 가는데 지나가던 까마귀가 무언가 물고 날아가다가 그의 바리때에 떨어뜨린 것이다. 그가 그것을 살펴보니 점을 치는 산가지였는데, 거기에는 '왕(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일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혼자만 알고 지냈다.

 

그 무렵, 신라 조정은 오랜 정쟁으로 제구실을 못했고, 왕은 권위를 잃어 백성들로부터 인정을받지 못햇다. 거기다 가뭄으로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백성이 많아 국고가 텅텅 비었다. 하지만 왕족의 사치와 향락은 오히려 심해져 조정은 강제로 지방에 세금을 징수했고, 그 때문에 백성들의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도적 떼가 들끓었다. 그럼에도 조정은 힘이 닿지 않아 구경만 하고 있는 지경이 되었고, 지방 호족들은 군대를 일으켜 각자 세력을 형성했다. 

 

궁예가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반란군 대열에 합류한 것은 이 때쯤이다. 삼국사기에 진성왕 5년(891년)에 그를 양길 휘하에서 기병 1백여 명을 몰고다니는 장수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궁예는 적어도 진성왕 즉위 초기에 반란군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반란군에 처음 가담한 때는 죽주(안성)의 기훤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기훤은 부하들을 잘 품어주지 못하던 권위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탓에 궁예는 기훤 밑에 오래 있지 않았다. 그는 기훤 휘하에 함께 있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함께 양길 밑으로 가버렸다. 청길을 비롯한 세 사람은 나중에 청주, 괴산의 세력가로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궁예를 포함한 그들 넷은 기훤 휘하에서 매우 비중있는 역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들이 대거 양길 밑으로 가버렸다는 것은 기훤이 세력이 붕괴되었던 것이나 다름 없다. 그것은 기훤의 이름이 더 이상 기록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훤은 이때 제거되었거나 자멸한 것으로 보인다.

 

기훤이 오만무례하고 사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궁예가 양길 휘하로 옮긴 사실을 감안할 때, 양길은 포용력이 넓고 인재를 알아주는 성품이 아닌가 싶다.

 

양길 밑으로 들어간 궁예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891년에는 기병 1백명을 이끌 정도였지만, 894년에는 휘하에 3천 5백 명을 거느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이 때부터 그는 부하들을 14개 대오로 편성하는 등 지휘 체계를 확립했는데, 김대검, 모흔, 장귀평, 장일 등 네 명의 부장들이 중추적인 역활을 했다. 이들은 비록 이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궁예의 성장과 창업에 막대한 역활을 햇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로 궁예는 계속 세력이 성장하여, 895년에는 강원도 북부 일대와 경기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고,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국가 형태를 갖췄으며, 896년에는 송악(개성) 의 호족인 왕건의 아버지 왕륭을 신하로 맞아들인 것으로 보아 경기 북부와 황해도 일부를 손안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98년에는 패서도(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와 한산주 30여 성을 빼앗고 송악군에 도읍을 정해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궁예가 독자적으로 국가를 세우려 하자, 양길은 청주, 충주, 괴산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함께 힘을 합쳐 궁예를 공격하지만 오히려 패배하여 무너졌고, 궁예는 그 여세를몰아 양길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청길,원회, 신훤 등도 굴복시키고, 901년 마침내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창업한 뒤로 궁예는 꾸준히 땅을 넓혀가며 당시 큰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견훤의 후백제와 영토를 다툰다. 그러면서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로 바꾸고, 905년에는 철원으로 환도했다.

 

이 때 관제를 대폭 개혁했는데, 신라 관제를 버리고 독창적인 체제를 획립한 것이다. 광평성을 설치하여 광치나(시중), 서사(시랑), 외서(원외랑) 등의 관원을 두었고, 병부, 대룡부(창부), 수춘부(예부), 봉빈부(예봉성), 의형대(형부), 납화부(대시부), 조위부(삼사), 내봉성(도성),금서성(비서성), 남상단(장작감), 수단(수부), 원봉성(한림원), 비룡성(태복시), 물장성(수부감), 사대(외국어 학습 기관), 식화부(과수재배기관), 장선부(성황수리 기관), 주도성(기물제조 기관) 등을 설치했다. -괄호안은 고려 관제-

 

당시 철원은 백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궁예는 청주의 민가 1천 호를 이주시켜 도읍을 형성했다. 그리고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바꾸고, 연호를 '수덕만세'라고 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궁예와 신하들 간에 알력이 생겼다. 궁예가 많은 신하들을 죽인 사실로 미뤄 궁예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907년에 당나라가 망하면서 당에 유학해 있던 많은 인재들이 한반도로 돌아왔을 터이고, 궁예는 그들 인재를 등에 업고 개혁정책을 시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