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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57 : 고려의 역사 25 (후삼국 실록 18)

두바퀴인생 2011. 6. 1. 04:11

 

 

 

 

한국의 역사 257 : 고려의 역사 25 (후삼국 실록 18)

 

 

불세출의 영웅 견훤(867~936년)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인데, 함통(당나라 의종 연호) 8년 정해(867년)에 났으니, 본래의 성은 이씨 였는데, 뒤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관계(당나라 희종 연호) 연간에 사불성(또는 사벌, 상주)에 자리를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바, 특히 훤은 유달리 유명하고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사> 본전에 적힌 견훤의 출생 관련 내용을 이렇게 옮겨 놓았다. 또한 <이제가기>라는 책을 인용하여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진흥왕의 왕비 사도의 시호는 백승부인인데, 그녀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은 파진간 선품이고, 선품의 아들 각간 작진이 왕교리파를 아내로 삼아 각간 원선을 낳았으니, 이가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첯째 부인은 상원부인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이다. 그들에게서 아들 다섯을, 딸 하나를 얻었다. 그 맏아들이 상보 훤이요, 둘째가 능애요, 셋째가 장군 용개요, 넷째 아들이 보개요, 다섯째 아들이 소개요, 맏딸이 대금도주이다."

 

<삼국사>와 <이제가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진흥왕의 왕비 혈통이다. 하지만 이씨 성을 쓴 것으로 보아 진흥왕의 자손이 아니라 진흥왕이 죽고 난 뒤에 백승부인이 이씨에게 재가하여 낳은 셋째 아들 구륜공의 후손이다. 하지만 아자개가 농부로 살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구륜공의 후손은 물락하여 귀족 신분을 유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여하튼 농부로 살던 아자개의 장남으로 태어난 견훤은 체격이 건장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견훤은 자라나서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여,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그가 종군하여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쪽 해변에 배치되어 수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는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보다 앞장섰으며,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비장으로 지내던 견훤은 아자개가 상주를 장악하고 군벌을 형성하자 상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돕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버지 아자개와 이복 형제들과의 갈등으로 집을 나와서 그는 서라벌 주변으로 이동하여 활동했다. 그의 기품과 부하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희자되더니 이내 경주 주변에서 많은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보다 더 큰 세력을 성장하였고, 890년에는 무리 3천을 이끌고 무진주(전남 광주)로 내려가 왕이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신라 서면 도통 지후 병마 제치 지철 도독 전무공 등 주군사 행 전주 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국 개국공 식읍 2천 호'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892년 완산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창업 이후 견훤은 날로 성장하였고, 백제는 궁예가 나라를 세우던 901년까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하지만 903년에 왕건에게 나주를 빼앗기고, 905년에는 궁예가 충청도에서 평안도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게 되면서 궁예의 세력이 더 커졌다.

 

하지만 918년에 왕건이 반란을 일으켜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개국하자, 태봉에 속해있던 공주, 홍성, 청주 일부 지역이 귀순해옴에 따라 견훤의 세력이 고려를 압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918년 9월 견훤은 예상치 못한 사건에 직면하는데, 상주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아버지 아자개가 고려에 귀순해 버린 것이었다. 이 의문을 풀어줄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아자개의 부인이 둘이었는데, 견훤이 장남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견훤은 첯부인에게서 태어난 듯하다. 그 아우들이 능애, 보개,용개,소개 등으로 같은 항렬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비해, 견훤만 전혀 딴판의 이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견훤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아자개의 둘째 부인 소생으로 판단된다. 견훤은 계모와 이복형제들 속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견훤이 소년 티를 채 벗지 않았을 때 군대에 지원하여 견군 시위대가 된 것도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군대에 적을 둔 뒤로 그는 자질을 인정받는 군인이 되었고, 그 덕에 갓 스물을 넘긴 어린 나이에 비장의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를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는 별 수 없이 어렵게 진급한 비장 벼슬을 버리고 바로 상주로 가지 않고 서라벌 주변 일대를 돌아다니며 반란군이 되었다. 그에 관한 기록 중에 상주에서 활약했다는 기사가 없으며 아자개와 연관된 기사도 없다.

 

왜 그랬을까? 견훤의 이런 행동은 아자개가 왕건에게 투항해 버린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즉 견훤은 소년 시절부터 계모와 이복형제들 사이에 좋지 않은 관계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그 해결책으로 경군을 지원하여 집을 떠나 군대에 입대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비장으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던 그가 아버지가 난을 일으킨 사실 때문에 장수의 길을 포기하고 반란군 대열에 합류해야만 했다. 그가 아버지와 불화 때문에 집을 떠났다면, 아버지의 반란 또한 그에게 심한 상처와 절망감을 안겨 주었을 수 있다. 견훤이 반란군이 되긴 했어도 상주로 가지 않고 경주 주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견훤이 고향인 상주에 나라를 세우지 않고 굳이 낯선 전라도 지역까지 내려가서 창업의 타전을 잡은 것도 가급적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있고 싶지 않앗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리 그렇더리도 후에 아자개가 아들인 견훤의 나라로 가지 않고, 아들의 최대 적인 왕건의 품으로 간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