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259 : 고려의 역사 27 (후삼국 실록 20) 본문
한국의 역사 259 : 고려의 역사 27 (후삼국 실록 20)
친화력의 승부사 왕건(877~943년)
아버지 왕륭이 송악(개성)의 호족이며 궁에가 세운 태봉국 신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왕건의 조상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조선 문종대에 정인지 등에 의해 139권으로 편찬된 <고려사>의 '태조실록'에서 발췌한 3대 조상들의 추존 묘호만 전할 뿐이다.
고려를 세운 후 왕건은 증조부를 원덕대왕, 증조모를 정화왕후, 조부를 의조 정강대왕, 조모를 원창왕후, 부친을 세조 위무대왕, 모친을 위숙왕후로 추존했다는 기록 내용이 전부다. 다만 고려 의종 때 인물인 김관의의 <편년통록>에 그들에 얽힌 민담들이 함께 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왕건의 탄생설화도 실려 있는데, 이 이야기는 신라 말 도참사상으로 유명했던 승려 도선이 등장하고 있다.
왕건의 아버지 용건(고려사에 기록된 정식 이름은 왕륭이다)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살림을 치린 곳은 송악산 남쪽 기슭이었다. 그들이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어느 날 그들 부부에게 도선이 찿아들었다. 도선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고승 일행에게서 풍수지리법을 익힌 후에 귀국하던 중이었다(도선의 당나라 유학설은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도선은 용건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 중얼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어허,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들은 용건의 아내는 서둘러 남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도선의 말을 전하자 용건은 급히 도선의 뒤를 쫓았다.
용건이 자신을 쫓아오자 도선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되어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겁니다. 아이를 얻으면 이름을 건이라 하십시요."
도선은 그렇게 말하고 봉투를 만들어 겉에 간단한 글귀를 적어넣었다.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삼한을 통일할 주인 대원군자를 당신에게 드리노라."
용건은 도선이 주는 봉투를 받아들고 백 번 절하고, 그가 지시하는 대로 집을 짓고 살았다. 그 달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 달 뒤에 아이를 낳았다. 용건은 도선의 말대로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 지었다. 이때가 877년 1월이었다.
이 이야기는 김관의의 <편년통록>에 기록된 내용을 <고려사>에 옮겨 적은 것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어쨌든 왕건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왕
이 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운명론은 대개의 인물 설화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형식으로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왕건의 탄생설화에 도참사상으로 유명한 도선을 끌여들인 것은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편자의 극적 장치로 판단된다. 도선이 신라 말기에 살았던 실존 인물인 점을 부각시켜 왕건의 탄생과 연결시켜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가 짙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도선과 왕건의 관계는 비단 탄생설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민지의 <편년강목>에는 왕건이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도선이 다시 송악산을 찿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왕건을 찿아온 도선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혼란한 때에 상응하여 하늘이 정한 명당에 태어났으니, 삼국 말세의 창생들은 당신이 구제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선은 이렇게 말하고 왕건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고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보고 이치를 헤아리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해서 도선은 왕건의 스승이 된 셈이다.
이 기록 이외에 왕건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찿아볼 수가 없다. 다만 고려사 태조편에는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고,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며, 턱은 모나고 안면은 널찍하였으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여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이 있었다."
고려사 표현대로 그의 탁월한 기상과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은 청년 시절부터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896년에 아버지 왕륭과 함께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이후 뛰어난 장수이자 현명한 관료로서 명성을 떨치며 성장한다.
궁예의 신하가 된 왕건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 왕륭의 추천으로 송악(개성) 성주가 되었고, 898년에 궁예가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 송악성을 쌓은 공에 힘입어 정기대감의 벼슬을 얻었다. 900년에는 경기도 광주, 충주, 청주, 괴산 등을 정벌하여 궁예의 영토 확충에 큰 공을 세웠고, 그 공로로 아찬 벼슬에 올랐다. 903년 3월에 수군을 이끌고 나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0여 군현을 장악한 뒤에 개선하면서, 그는 궁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기에 이른다.
906년부터 궁예는 신라의 주변 잔여 땅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서라벌 공략에 매진하게 되는데, 백제의 견훤 또한 서라벌 주변 땅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궁예군과 견훤군은 경주 근처에서 잦은 충돌을 일으켰으며, 906년에는 견훤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상주 시화진을 장악했다. 궁예는 곧 왕건을 앞세워 견훤을 대적케 했는데, 왕건은 견훤을 여러 차례 격파하여 영토확충에 크게 기여하였다.
909년부터 궁예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강화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와중에 신하들이 반발하였고 그 결과, 많은 신하 및 호족들이 죽거나 유배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호족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백제 땅 한 모퉁이에 자리한 나주가 몹시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궁예는 나주를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가장 신임하던 왕건을 한찬으로 관등을 높여 해군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그곳으로 보냈다.
당시 나주는 백제군의 지속적인 공략으로 매우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나주 근해는 백제 수군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어 나주와 개성간의 뱃길이 차단되었고, 그 때문에 그의 부하들도 나주로 가는 것을 껴렸다. 하지만 왕건은 특유의 전술과 용맹함으로 전남 해안까지 진입했다. 거기서 왕건은 기대치 않았던 수확을 얻었는데, 견훤이 오월국에 보내는 사신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왕건은 일단 그들 포로를 데리고 철원으로 돌아오니, 궁예가 몹시 기뻐하며 표창을 내렸다.
왕건은 910년 다시 나주 진입을 시도하였다. 개성 풍덕 앞바다에서 전함들을 수리하여 알찬 종회와 김언을 부장으로 삼고 병력 2천 5백과 함께 서해를 타고 내려가 백제 수군 기지인 전라도 진도를 먼저 공략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다시 북상하여 나주 앞바다 섬 고이도를 차지하고 진을 쳤다. 그리고 이내 나주로 진입 작전을 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면산의 여름 3 : 지방 공무원 비리 확산 (0) | 2011.06.04 |
---|---|
한국의 역사 260 : 고려의 역사 28 (후삼국 실록 21) (0) | 2011.06.04 |
한국의 역사 258 : 고려의 역사 26 (후삼국 실록 19) (0) | 2011.06.02 |
한국의 역사 257 : 고려의 역사 25 (후삼국 실록 18) (0) | 2011.06.01 |
한국의 역사 256 : 고려의 역사 24 (후삼국 실록 17) (0) | 2011.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