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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60 : 고려의 역사 28 (후삼국 실록 21) 본문
한국의 역사 260 : 고려의 역사 28 (후삼국 실록 21)
친화력의 승부사 왕건(877~943년) : 계속
나주 앞바다는 견훤이 직접 지휘하는 선단이 일렬로 늘어선채로 해안선을 봉새하고 장악하고 있었다. 견훤의 수군은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늘어선 대형이었다.그 형세에 왕건의 수하 장수들이 퇴각할 것을 건의하자, 왕건은 그들을 다독이면서 특유의 전술을 구사하여 견훤의 수군 대열을 무너뜨렸다.
견훤은 왕건의 독특하고 치밀한 공략에 말려 병력 5백을 잃고 패주하엿고, 이내 왕건은 나주로 상륙할 준비를 하였다. 왕건이 한동안 나주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그 점을 눈치챈 김언을 비롯한 부장들이 불만을 늘어놓자 왕건이 이렇게 타일렀다.
"그런 일로 해이해지지 말게나. 오직 힘을 다해 복무하고, 다른 마음을 먹지 않으면 복 받을 날이 있을 걸세. 지금은 폐하가 혹독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음해를 일삼고 있는 시절일세. 때문에 중앙에 있는 자들은 모두 자기 신변을 보전하지 못하는 형편일세, 이럴 땐 차라리 정벌에 종사하고 왕실을 위해 전력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전하는 게 좋을 것이네."
사실, 왕건은 자원하다시피 해서 나주로 내려온 것이었다. 그는 빠르게 출세했고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다른 신하들을 자극하여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많았다. 궁예가 중앙집권화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반대하는 많은 신하들을 죽이자, 자연히 곳곳에서 역모설이 고개를 들었고, 그에 따른 희생자가 부지기수였다. 왕건은 결코 그런 희생의 대열에 휘말리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왕건의 말을 옳게 여긴 부장들은 차라리 변방에서 머무는 편이 목숨을 보전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그 뒤로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부장들을 다독거린 왕건이 나주로 진입하려 하자,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무렵 나주 연안에는 능창이라는 유명한 해적이 있었는데, 그는 뱃긿을 잘 알고 해전에 능하여 '수달'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능창은 나주 앞바다의 작은 섬 압해도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는데, 궁예에게 등을 돌린 자들을 포섭하고, 때론 백제군과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나주 병력을 괴롭히고 있었다. 심지어 망명자들이 모여 사는 갈초도의 반란군 세력과 힘을 합쳐 왕건의 함대를 공격하고, 왕건을 살해할 계획을 짤 정도였다.
비록 고려사는 그를 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궁예의 나주 지배에 대항하는 독립군 같은 부류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나주에서 망명해오는 세력과 힘을 결집했고, 때론 백제군과도 연계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왕건이 나주로 지입할 때 급습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주 앞바다는 크고 작은 여러 섬들이 있었고, 그 사이로 좁은 해협이 형성되어 있었다. 왕건이 나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 섬들 사이의 해협을 거쳐야 했고, 필요하면 섬에 머무르며 함선을 수리해야 할 입장이었다. 능창은 그 순간을 기다리며 치밀한 계획을 짜 두었다.
하지만 왕건은 능창의 공격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부하들을 풀어 밤늦게 갈초도 근처를 오가는 배들을 무조건 붙잡아오도록 했다. 능창은 왕건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왕건 함대의 정탐을 위해 정탐병을 보내야 했다. 그 일은 낮에는 용이하지 않아 밤에 이루어졌는데, 그 점을 간파한 왕건은 적진이 가까운 갈초도 근처에 병력을 숨겨두었다가 거기서 나오는 배는 모조리 잡아들였다. 필시 그 속에는 능창이 타고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왕건의 예상은 옳았다. 잡혀온 자들 중에 능창이 있었던 것이다. 능창은 바로 철원으로 압송되었다. 궁예가 그를 심문하여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 능창은 나주의 궁예 병력에겐 대단한 위협이 되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듯 나주 앞바다의 반군 세력을 제압한 왕건은 913년에 파진찬 관등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광치나에 임명되어 철원으로 돌아왔다.
막상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재상 자리에 오르고 보니 왕건은 몹시 부담스러웠다. 우선 자리가 자리인 만큼 탄핵받을 우려도 많았고 당시 곳곳에서 역모설이 나돌던 때라 참소 사건도 많아 그 처리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왕건은 탁월한 관리 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참소 사건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난히 해결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호족과 신하들이 호감을 가졌고, 자연히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늘어났다.
왕건이 그럴수록 몸을 사렸다. 혹여 궁예의 눈에 자신이 두려운 존재로 인식될까봐 겁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914년 자청하여 다시 나주로 내려갔다.
그 무렵부터 궁예의 독단과 전황은 한층 더 심해졌다. 이는 궁예의 중앙집권화에 대해 호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모설은 끊일 날이 없었고, 그에 따른 희생자도 수백 명씩 되었다. 또한 궁예는 점차 의심이 많아져 주변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 외척들과의 갈등 끝에 부인 강씨와 두 자식까지 죽이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왕건은 다시 철원으로 호출되었다. 잔뜩 긴장한채 철원으로 돌아온 왕건은 엄청난 궁예의 광기를 보게 되었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이른바 '관심법(觀心法)', 즉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을 행한다 하여 마치 신통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호족들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발을 누르기 위한 자구책차원이겠으나, 궁예의 행동은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만약 왕건에게도 의심의 눈길이 돌려지는 날에는 그도 목숨을 보장하기 힘든 상황임을 깨닭게 되었다.
그래서 왕건이 잔뜩 몸을 사리고 있는데, 918년 3월 왕창근의 거울 사건이 발생하였다. 거울에 적힌 글의 내용은 궁예가 멸하고 왕건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는 것을 예고하는 글이었다. 그러나 궁예는 해석이 어렵고 모호하여 한문 전문가들에게 해석을 의뢰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송사홍과 백탁, 허원 등의 기지와 노력으로 별일 없이 자나가는 듯했지만, 의심이 많아진 궁예는 왕건을 불러 역모를 꾸미지 않았내고 몰아세웠다. 왕건은 장주 최응의 도움으로 그 위기를 겨우 모면하고 목숨을 건졌지만 점점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홍유,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등의 마군 장수들이 반정을 건의했고, 심사숙고 끝에 왕건은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켜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개국 후에 왕건은 남아 있던 궁예의 잔존 세력과 그의 즉위를 반대하던 자들로부터 많은 저항을 받았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여 치밀하고 끈기 있게 해결해 나갔다.
안으로는 정략 결혼을 통해 호족들의 결속을 다지고, 바깥으로는 신라와 공조하여 백제에 대항했다. 때로는 백제와 회의조약을 맺어 평화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급기야 상황이 급변하여 화의를 유지할 수 없을 땐 목숨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 질곡같은 세월은 개국 후에도 18년이나 지속되었지만, 그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도디어 936년 9월 백제를 무너뜨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기에 이른다.
스무 살 이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터라 그는 몸으로 승부사 기질을 익혔다. 무장 출신에게서 단점이 드러나기 쉬운 과감한 측면은 온화한 천성과 유화적인 성품으로 상쇄시켜 나가고, 위기에 몰리거나 난처한 지경에 처하면 단호하고 신속한 결단과 행동으로 타개해 나갔다. 휘하의 호족은 물론이고 신라의 잔존 세력, 그리고 나중에는 백제의 견훤과 그 휘하의 신하들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성품 등 나약한 듯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친화력을 발휘하는 한편,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세운 사실과 견훤을 상대로 집요한 공격을 퍼붓는 모습에서 보듯 과감한 승부사 기질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의 승리는 바로 이러한 친화력과 승부사 기질의 조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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