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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56 : 고려의 역사 24 (후삼국 실록 17) 본문
한국의 역사 256 : 고려의 역사 24 (후삼국 실록 17)
비운의 혁명가 궁예(857~918년) : 계속
하지만 궁예는 호족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했다. 호족들은 조직적으로 궁예에게 대항했고, 궁예는 전횡과 독단으로 맞섰다. 그런 와중에 왕창근의 거울 사건이 발생하여 왕건과 불화가 생겻으며, 결국 918년 6월에 그토록 믿고 신임했던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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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궁예와 왕건
궁예의 죽음에 대해 고려사는 그가 도망을 치다가 배가 고파 남의 논에 들어가 이삭을 잘라먹다가 부양(강원도 평강)의 농부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경명왕 2년 기록에는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쪽 기록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왕건의 무리에게 피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바,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는 기록이 타당할 것이다.
궁예는 여러 행동에서 드러나듯이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과감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이 불리할 때 내심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며, 유리할 땐 가차없이 속내를 드러내 위용을 과시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뛰어난 인물에겐 매우 너그럽고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 반면, 일단 능력이 없는 인물로 판단되면 무섭게 짓밟아버리는 경향도 있었다. 그는 형세 판단이 매우 빠르고, 모든 일을 신속히 처리하는 능력도 있었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기질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은 때로 모나고 급한 행동으로 드러나,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몰락한 것이었다.
궁예의 마지막(드라마 태조 왕건)
불행한 운명을 안고 태어나 평생 부모 사랑 한번 받아보지 못한 그는 죽음 조치도 불운하여 무덤도 없으며, 그 시체는 버려져 까마귀 밥이 되었을 터이니, 혁명을 꿈꾸던 한 시대의 영웅이자, 나라를 세워 20여 년이나 왕으로 지냈던 인물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참담하고 서글픈 종말이 아닐 수 없다.
궁예에게는 부인 강씨와 청광, 신광 두 아들이 있었으며, 부인 강씨와 함께 죽임을 당한 두 명의 자식이 더 있었다.
태봉의 도읍지였던 철원에는 궁예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궁예가 망할 때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통곡을 했다는 명성산(울음산) 전설과 궁예의 한탄이 서려 있다는 한탄강 전설이 전한다. 그 외에도 철원 주변에는 궁예와 관련된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남아 있는 유적으로 이목면 승양리 성산에 길이가 약 4백 미터쯤 되는 산성이 있고, 내문면 마방리에는 길이 7백 미터 가량의 토성이 있으며, 북면 원리와 어운면 중강리에 걸쳐 있는 풍천원도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 둘레가 약 6천 미터, 내성 둘레가 약 4백 미터에 이르렀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다.
궁예는 자라면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되었다.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꿈을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세달사에 출가하여 무술을 익히고 남달리 세상일에 관심을 보인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그는 성격이 급하면서도 포악하였던 것은 중앙집권화에 대한 과욕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호족들을 다독거리지 못하고 자신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기를 강요하다가 반발하는 호족과 신하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그는 스스로를 부처로 자처하면서 독심술이라는 상대방 마음을 꿰뚫어본다면서 상대방을 위협하면서 조금이라도 역모의 기미가 보이면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러한 광경을 본 호족들이나 신하들은 모두가 궁예의 전횡에 몸을 도사리는 형세가 되었다. 왕건은 혁혁한 무공으로 궁에의 신뢰를 받으면서도 궁에의 마음 한 구석에는 왕건이 역모를 도모하지 못하도록 유화적인 태도도 보였다. 그러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자 왕건은 결국 수하 장수들의 건의로 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이미 다 만들어 놓은 나라를 송두리체 빼앗은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반정이나 역모가 모두 나쁜 것이라고 교육받아 왔고, 중국의 경우 9족, 한국의 경우 3족을 멸하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만약 역모에 대한 고변이 있을 경우에는 통상 그 사실여부를 밣히다기 대부분 고문이나 장살로 옥중에서 죽은 경우도 많았다.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시기에는 상대파벌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누군가를 내세워 고변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시대를 통해 반정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으나 대부분 쿠테타의 성격을 띠었다. 고려 시대는 강조의 난이 성공하엿고, 조선 시대에는 인조반정, 중종반정이 성공하였다. 즉 왕조의 교체없이 권력층 사이에서 벌어진 왕위 다툼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후삼국시대 반란군 중에서 견훤과 궁예가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지역 민심을 휘어잡고 성공적으로 국가 건설을 도모하였다. 이미 무너져가던 신라 조정에 대한 자연스런 반발로 태동된 것이다. 과거에는 왕의 전횡이나 왕권이 취약하고 신권이 강할 경우 왕을 갈아치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지도자와 지도층이 무능하고 권력층이나 지도층의 부폐와 비리가 만연하고 정의와 사치와 탐욕이 넘쳐나면 반드시 쿠테타나 반정, 반란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역사의 흐름이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흐른다지만, 역사는 어쨌던 승자에 의해서 흘러온 역사이다. 또 살아 남은 자의 역사이며 권력 투쟁의 역사이다. 누구도 비난할 수 없으며 누구도 옹호할 수도 없다. 역사는 승자와 기록자에 의해 가감되거나 부풀려 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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