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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7 : 고려의 역사 15 (후삼국 실록 8)

두바퀴인생 2011. 5. 22. 02:47

 

 

 

한국의 역사 247 : 고려의 역사 15 (후삼국 실록 8)

 

고려와 백제의 치열한 세력다툼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이듬해 1월 도성을 송악(개성)으로 옮긴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기에 대다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성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왕건의 입지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태봉은 궁예를 중심으로 호족연합국가였는데, 궁예가 사라지면서 자연히 호족들 간에 결집력이 약해지고 왕건은 이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항상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였다. 또 외부적으로도 더욱 강성해진 후백제를 상대해야 하는 처지였다. 다행스럽게도 왕건은 특유의 유화적인 성품을 앞세워 이러한 내외적인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해 나갔다.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들과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는 한편, 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건의 유화정책에 견훤도 호의를 보였다. 호전적인 궁예보다 왕건이 상대하기에 편하다고 판단한 견훤은 고려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도 하였고, 몇 번에 걸쳐 신하들간의 교류도 추진하기도 하였다. 견훤은 내심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고 안정시키는 동시에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적인 관계를 통해 국가적인 면모를 일신하여 자신을 한반도 지역의 맹주로 인식시키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편 신라도 왕건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신라 장수 출신인 역적 견훤보다 호족 출신의 왕건을 더 믿을 만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려는 뜻을 비쳤다.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2년 동안은 이러한 평화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920년 견훤이 신라 지역인 합천 대야성을 침공함에 따라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합천의 대야성이 무너지자 신라의 진주, 거창, 산청 등 경상 서부와 북부 지역이 위협을 느껴야 했고, 후백제의 통일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때문에 경상 북부 지역의 호족들이 불안을 느낀 나머지 고려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후백제의 신라 침공에 대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던 고려는 925년 드디어 조물성(경북 안동 또는 상주 부근) 싸움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후백제 견제전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 전쟁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려와 후백제는 휴전을 선언하고 화의를 맺었다. 화의 조건으로 서로 인질을 교환했는데, 견훤은 처의 친족인 진호를 고려에 보냈으며, 왕건은 사촌동생인 왕신을 후백제에 보냈다.

 

그러나 두 나라 간의 화의 조약은 이듬해 고려에 갔던 진호가 갑자기 병으로 죽게 되자 그만 깨지고 만다. 견훤은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하고 왕신을 죽인 후에, 공주성을 기습하였다. 이로써 고려와 후백제의 본격적인 통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가 싸움이 시작되자 신라는 고려를 응원했다. 경애왕은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하늘이 그냥두지 않을 것."이라며 왕건을 지원할 뜻을 비쳤다. 이러한 경애왕의 언행과 태도에 대해 신라의 동향을 보고받은 견훤은 내심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려와 후백제가 막 전쟁 상태로 돌입했을 때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발흥하여 발해를 멸망시켰고,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몰려 들었다. 발해 유민이 고려로 내려온 덕분에 왕건은 병사의 수를 늘릴 수 있었고, 견훤과의 싸움에도 그들을 동원하게 된다.

 

한편 전쟁 과정에서 견훤이 갑자기 서라벌을 침범함에 따라 신라 백성들의 감정은 고려에 더욱 우호적으로 변한다.  927년 9월 견훤은 경상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서라벌을 기습한다. 허약한 신라의 서라벌을 장악한 그는 경애왕과 많은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신라는 견훤이 서라벌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에 급히 원병으로 요청했지만, 고려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서라벌은 함락되고 만 것이다. 서라벌을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히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게 되는 데, 퇴각하던 중 공산(팔공산)에서 고려군과 조우하여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견훤은 공산 싸움에서 왕건이 이끌던 고려군을 대파하고 고려군은 이 싸움에서 수 천명의 기병을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 뛰어난 장수들을 잃는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견훤에게 포위되자 신숭겸의 눈물어린 건의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갑옷을 바꿔 입고 자신을 대신하여 견훤군을 유인하고 자신은 산 속에 숨어 있다가 겨우 목숨만 건져 송악으로 돌아가 부하들을 잃은 슬픔에 한동안 잠기게 된다.

 

공산싸움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된다.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하지마 견훤은 군사들의 노략질로 인해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성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그래서 이에 분노를 느낀 경상 북부의 호족들이 대거 고려로 발길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한동안 열세에 놓여 있던 고려군은 경상도 고창(경북 안동) 병산싸움을 계기로 전세를 바꿔놓는데 성공한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하던 고려군은 한때 완전히 수세에 몰리지만, 유금필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후백제군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병산싸움 이후 백제군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사기를 회복하기 위해 서해안 일대를 공략하지만 유금필에게 길이 막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회군한다. 그러는 가운데 양국 간의 전쟁은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때를 이용하여 왕건은 고려에 투항해온 재암성(경북 진보) 장군 선필의 주선으로 서라벌을 방문하게 된다.

 

왕건이 서라벌을 방문하자 경순왕 김부를 비롯하여 신하, 백성들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에 따라 강릉의 김순식, 의성의 홍술, 포천의 성달 등이 투항하고, 울산과 그 주변의 110여 성도 고려에 예속됨으로써 왕건은 공산 전투 이후 처음으로 승기를 잡게 된다.

 

하지만 기고만장해 있던 왕건 932년 9월에 예상치 못한 급습을 당해 큰 피해를 입는다. 고려의 용장 유금필이 정정에 휘말려 유배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견훤은 유금필이 없는 고려를 궤멸시킬 좋는 기회로 생각하고  수군대장 상귀에게 병력을 주어 개성 해안을 공격하게 한 것이었다. 이 공격으로 고려는 염주(황해도 연안), 백주(황해도 배천), 정주(풍덕) 해안에 정박되어 있던 함선 1백 척을 잃고, 저산도 목장에서 기르고 있던 군마 3백 필도 약탈당했다. 또 10월에는 해군 장군 상애가 고려 북방의 섬 대우도(평북 용천)를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써 고려 조정을 또한 번 흔들어 놓았다. 왕건은 대관, 만세 등에게 해군을 내주고 상애를 저지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만세가 상애에게 밀려 퇴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왕건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그때 다행히 곡도(백령도)에 귀양 가 있던 유금필이 스스로 군대를 조직하여 상애를 퇴각시켰지만, 해군력만큼은 백제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던 왕건에게는 심대한 타격이었다. 그래서 왕건은 한동안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절망감에 빠져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934년 9월 운주성을 공격하는 것을 기점으로 자신감을 되찿게 되는데,왕건은 유금필의 활약으로 운주성 전투에서 견훤에게 대승하였고, 그 결과 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되찿는 한편, 견훤의 수족같은 장수들을 대거 포로로 잡았다.

 

운주성 패배 이후 견훤은 심한 패배감에 젖어 지냈으며, 설상가상으로 태자 책봉 문제로 내분을 겪으면서 백제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