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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8 : 고려의 역사 16 (후삼국 실록 9)

두바퀴인생 2011. 5. 23. 04:16

 

 

 

한국의 역사 248 : 고려의 역사 16 (후삼국 실록 9)

 

국운을 건 명승부들

 

대야성 전투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견훤의 20년 공든 탑-

 

925년 10월, 고려와 백제는 화친조약을 맺고 견훤의 사위 진호와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을 서로 인질로 삼아 교환했다. 덕분에 양국은 오랫만에 평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4월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진호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 조정이 자신의 사위를 죽였다고 대노하여 인질로 와 있던 왕신을 죽인뒤에 , 군대를 이끌고 공주 방면으로 진격해 왔다. 

 

 

                                                 

 

 

당시까지 욍신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왕건은 그의 안전을 위해 일체 백제의 공격에 대응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왕신이 견훤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왕건은 분을 참지 못하고 927년 정월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와 용주(경북 용궁)를 공격하여 함락시켜 분풀이를 하였다.

 

막상 왕건이 전면전 태세로 나오자 견훤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왕신의 시신을 고려에 보냄으로써 은근히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그러나 왕건은 오히려 군대를 몰아 운주성(충남 홍성)을 공격하여 긍준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군대를 몰아 금품성(경북 분경 산양면)을 무너뜨렸으며, 이내 공주성으로 병력을 몰아갔다.

 

공주는 군사적 요충지대로 태봉 시절에는 궁예에게 예속된 땅이 었다. 하지만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울 때, 그곳 성주로 있던 이흔암이 성을 버리고 철원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그곳 군현의 장수들은 모두 견훤에게 성을 바치고 백제에 투항해 버린 것이었다. 왕건은 그 점을 항상 안타까워 하며 되찿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백제 또한 경게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 공주에 왕건이 대병을 이끌고 공격을 가해 왔으니, 백제로서는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건이 공주를 공격한 것은 견훤의 시선을 그곳에 묶어두기 위한 성동격서의 전략으로 보인다. 왕건이 진짜 노린 곳은 대야성이었다. 그러나 대야성은 워낙 견고한 데다가, 그곳을 노리고 있다는 낌새를 주게 되면 견훤의 방비가 강화될 것이므로 공주를 먼저 친 것이다.

 

그 속내도 모르고 견훤은 공주성 방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왕건은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백제군을 공주성에 묶어두고, 한편으로는 영창과 능식에게 수군 수천을 내주어 남해를 돌아 강주(진주)에 잠입토록 하였으며, 김락에게는 보병과 기병을 맡겨 육로를 통해 강주로 향하게 하였다. 물론 목표는 대야성이었다.

 

대야성은 견훤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성이었다. 그는 창업 이래 수차에 걸쳐 대야성 공략에 나섰는데, 901년 8월 처음으로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916년 8월에도 재차 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대야성은 삼국시대에도 백제군이 누차 공격하여 얻으려 했던 곳인데, 성이 워낙 견고한 데다 전략적으로 쓸모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지형적으로 보자면 대야주는 동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남동쪽으로 남강이 흐르며, 서쪽으로는 소백산맥이 버티고 있고, 북쪽으로는 수도산, 가야산, 오도산 등을 잇는 가야산맥이 막고 있다. 이에 따라 교통상으로는 서쪽으로 거창을 거쳐 육십령을 넘으면 전주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주, 구미, 선산, 상주에 이르고, 남으로 남강을 타고 내려가면 강주(진주)를 거쳐 남해에 이르고, 진주를 거쳐 하동에 이르면 섬진강 건너 구례 땅을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대야성을 얻으면 서부 경남은 물론이고 경북 지역의 요충지까지 완전히 장악이 가능한 곳이며, 경주까지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견훤의 대야성 확보를 숙원 사업으로 여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920년 10월, 견훤은 대야성 공략 20년 만에 숙원을 풀었다. 대야성을 장악함으로써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진주, 구성, 산청, 함양, 하동, 거창, 성주, 구미,선산, 칠곡 지역의 대부분을 백제가 지배하게 되엇다.

 

그런데 그토록 소중한 대야성이 느닷없이 무너진 것이다. 왕건의 공주성 공략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견훤은 그해(927년) 4월에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접한다. 영창과 능식이 이끄는 고려 수군 수천이 강주 앞바다를 유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서야 견훤은 왕건이 대야성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영창과 능식이 강주로 짓쳐들어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김락의 수천 병력이 강주로 밀려들었다.

 

당시 강주는 왕봉규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원래 강주성은 신라 장수 윤응이 지키고 있었으나, 920년 대야성이 견훤에게 무너지자 고려에 투항해 버렸다. 말하자면 그때부터 강주는 고려 땅이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윤웅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삼국사기에는 924년 왕봉규를 천주(경남 의령) 절도사라고 하면서, 독자적으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927년 3월에 후당의 명종이 권지강주사 겸 회화대장군으로 삼았으며, 4월에는 왕봉규가 임언이라는 인물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는 왕봉규가 924년에 의령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927년에는 강주지역까지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독자적으로 후당에 조공할 정도로 거의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즉 왕봉규는 원래 의령의 절도사로 있다가 주변 지역을 장악하고 이어 강주 장군 윤웅을 제거한 뒤, 강주 전역을 손안에 넣고 다스렸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927년 4월 기사가 끝이다. 묘하게도 그것은 영창과 능식이 이끄는 고려 수군이 강주를 공격하고 남해 연안의 전이산, 노포병, 서산,  돌산 등지를 장악한 시점과 일치한다. 그리고 3개월 뒤인 7월엔 김락이 이끄는 고려군이 추허조 등 백제군 3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대야성을 수중에 넣었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해 볼 때, 왕봉규는 927년 4월에서 7월 사이에 고려군에게 강주를 빼앗기고, 그 와중에 전사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고려군이 강주를 공격할 때 왕봉규는 견훤과 결탁을 맺은 상태였으며, 백제군의 대야성 확보와 수성에 큰 역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려군이 수륙 양동 작전으로 강주가 무너지자, 대야성 백제군은 우군을 잃고 수세에 몰렸다. 그리고 결국 수성전 끝에 패전하여 장군 추허조를 비롯한 30여 명을 포로로 잡았던 것이다.

 

견훤은 왕건의 전술에 휘말려 그토록 아끼던 대야성과 군사적 요충지 강주를 하루아침에 잃고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야말로 20년 공든 탑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견훤을 놀리기나 하듯이 왕건은 강주 순행긿에 올라 유유히 남강 주변을 거닐며 회심의 미소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