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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6 : 고려의 역사 14 (후삼국 실록 7)

두바퀴인생 2011. 5. 21. 03:05

 

 

 

한국의 역사 246 : 고려의 역사 14 (후삼국 실록 7)

 

왕건의 반정에 반발한 인물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 반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환선길의 역모 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며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에 침입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은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복병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을 받아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처형당하였다.

 

 

                                                 

 

 

이들 형제 이외에도 청주 출신들이 역모를 도모하기도 했다.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을 비롯하여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자 청주에 가서 반란을 도모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 계획이 복지겸의 정보망에 결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역모 혐의가 탄로나자 이들은 모두 도망하였는데, 배총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붙잡혔다. 왕건은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지만 청주 출신 수하 현율이 왕건에게 간곡히 만류했다.

 

현율은 역모 일당 중 경종은 매곡(청주) 성주 공직의 처남이라고 밝히면서 만약 그를 죽이면 매곡성이 반기를 들게 될 것이라고 충고한다. 따라서 역모 혐의자들을 죽이지 말고 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데, 왕건은 현율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놓아주려 하였다. 하지만 마군대장군 염상이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염상은 경종이 이미 오래 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에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궁예의 반란 방지책이었다. 매곡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아들을 데려오도록 지시했던 모양이다.

 

볼모를 데려간다는 것은 곧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 왕건은 염상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왕건을 위협한 또 한 사람은 웅주(공주) 성주 이흔암이었다. 이흔암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자 웅주성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상경한다. 이 때문에 웅주는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흔암은 원래 궁예 집권 말기에 장수가 되어 웅주를 점령하고 그곳 성주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궁예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고, 궁예도 그를 매우 총애하였던 모양이다. 따라서 그는 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왕건을 용납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왕건의 신하로 머물러 있기를 거부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웅주성을 버리고 상경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왕건은 이흔암의 그런 태도가 무척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왕건은 그가 웅주성을 포기한 것에 대하여 문책하지 않았다. 한때 같은 장수였던 그가 왕건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형대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은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

 

염탐꾼의 말에 의하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 석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 텐데..."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 하고, 그의 자산을 모두 몰수했다.

 

이흔암 역모사건은 조작된 흔적이 역력하다. 이흔암이 역모 계획을 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왕건은 궁예의 측근인 그가 철원에 머무르면 민심이 동요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보는 저잣거리에서 그의 목을 베게했다. 이흔암의 입장에서 보면 왕건은 섬기던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역적이기 때문에 적어도 왕건 밑에서는 신하노릇을 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이흔암이 웅주성을 포기하고 철원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진정 역모 계획이 있었다면 차라리 웅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안전지대인 웅주성을 버리고 철원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그가 전혀 역모할 뜻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흔암 사건은 철원 지역 정서가 왕건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왕건이 도성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긴 것도 바로 이런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 이외에도 명주(강릉)의 김순식, 명지성(경기 포천)의 성달, 문소(경북 의성)의 홍술 등이 왕건 휘하에 들기를 거부하였고, 웅성(공주)과 그 주변의 홍성, 서산 일대의 성주들이 대거 견훤에게 투항해 버린다. 이로 인해 왕건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