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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4 : 고려의 역사 12 (후삼국 실록 5)

두바퀴인생 2011. 5. 19. 02:55

 

 

 

 

한국의 역사 244 : 고려의 역사 12 (후삼국 실록 5)

 

궁예의 개혁정책과 호족들의 반발

 

궁예는 세력이 확대되자,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왕권 확립에 주력하였다. 그 첯 번째 작업으로 911년 국명을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도 '수덕만세'로 고쳤으며, 호족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단행했다.

 

궁예의 중앙집권화와 개혁정책에 대한 내용은,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내린 조서에 일부 드러나 있다.

"이전 임금(궁예)은 우리 나라 정세가 혼란할 때 일어나서 도적들을 평정하고 점차 영토를 개척하였으나,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섣불리 혹독한 폭력으로 하부 사람들을 대하며 간사한 것을 높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위압과 묘멸로써 요긴한 술책을 삼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과세가 과중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화하였다. 그런에도 궁궐을 크게 짓고, 제도를 위반하여 이에 따르는 고역이 한이 없어서 드디어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켰다."

 

 

 

                                                 

 

 

이 내용은 반정을 도모한 왕건과 호족들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궁예가 중앙집권화와 개혁정책을 실시했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혹독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통일이라는 과제가 앞에 놓여 있는데 지나치게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며, 세금이 과하다는 것은 국고 확충을 위해 애썼다는 뜻이며, 궁궐을 크게 짓고 제도를 위반하였다는 것은 왕의 위상을 높이고 제도를 만들어 개혁을 단행하려 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국가의 세금 수입은 대개 토지에서 온 것이므로 세금을 과하게 징수했다는 것은 토지소유제도를 개혁하고, 그에 따른 세금법을 손질한 것을 의미한다. 혹독한 폭력은 곧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파들을 가차없이 제거했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군사제도에 대한 개혁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당시 병력관계를 담당하는 순군부라는 관부가 있었는데, 이것은 태봉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병부보다 상위의 부서였다. 원래 궁예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는 병부에서 국가 병력에 관한 소임을 맡았으나, 그 뒤 어느 시기부터 순군부가 생겨 병부는 그저 병력에 관한 행정 업무만을 담당하는 보잘것없는 부서로 전락하게 된다. 순군부에 지방 병력에 대한 감찰권과 지휘권이 부과된 것을 볼 때, 이것은 궁예가 지방 호족들의 병력을 중앙에서 직접 지휘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말하자면 순군부는 궁예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지방 병력의 독자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설치한 부서였던 것이다.

 

당시 호족들은 자신의 사병을 거느리고 전쟁에 참여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들 사병을 모두 순군부에 예속시켜 지휘 감독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호족들의 힘을 엄청나게 약화시키게 된다. 그들 사병은 평시에는 호족들의 땅을 일구고 농사를 개간하고 짖는 역활을 겸하고 있엇으므로, 그들이 순군부에 예속되어 조정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되면 호족들의 경제는 심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궁예의 순군부 설치는 이렇듯 호족들의 군권과 경제력을 동시에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추진된 강력한 개혁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순군부 설치는 호족들의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의욕이 강하였던 궁예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사안이었고, 결국 궁예와 호족들 간에 힘겨루기 양상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궁예는 이처럼 토지, 군사, 관제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고, 호족들은 그에 반발하여 왕과 한판 힘 싸움을 전개했다.

 

'고려사'에 궁예가 숱한 사람들을 죽여 천하에 둘도 없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바로 왕과 호족간에 힘겨루기 과정에서 많은 호족들이 죽음을 당한 것을 왕건의 입장에서 왜곡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궁예는 자신의 부인 강씨와 두 명의 자식까지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또한 호족들 간에 갈등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였을 것이다.

 

후에 고려 왕조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바로 고려 제4대 왕 광종이 '노비건안법'과 '과거제'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호족들의 반발로 많은 호족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심지어 자신의 태자까지 죽이려 한 예가 그것이다. 광종의 비 대목왕후도 호족들의 편을 들어 '노비건안법'을 철회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그 때문에 광종과 대목왕후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진다. 대목왕후와 광종이 이복남매라는 점을 감안할 때, 호족 출신인 궁예의 부인 강씨는 한층 강력하게 궁예의 개혁정책에 제동을 걸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사형에 처한 것은 바로 호족들에 대한 궁예의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예가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미륵불을 자청한 것도 백성들에 대한 사상적인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광종이 실시한 일련의 개혁정책이 호족들에겐 심한 반발을 쌌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크게 환영받는 점으로 볼 때, 궁예의 개혁정책 또한 일반 백성들의 호응 속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궁예가 개혁을 위한 사상적 기반을 미륵불 신앙에서 찿은 것이 그 증거이다.

 

미륵불 신앙은 계층을 불문하고 당시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이었고, 궁예는 이것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예의 개혁은 다소 섣부른 감이 있었다. 왕건의 표현대로 통일이라는 대과업을 앞두고 호족들을 지나치게 자극한 것은 확실히 실책이었다. 비록 쓰러질 날만 기다리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신라 왕실이 유지되고 있었고, 강력한 경쟁자인 견훤이 칼을 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궁예는 너무 빨리 중앙집권화에 집착했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몰락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