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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3 : 고려의 역사 11 (후삼국 실록 4)

두바퀴인생 2011. 5. 18. 02:45

 

 

 

한국의 역사 243 : 고려의 역사 11 (후삼국 실록 4)

 

견훤과 궁예의 주도권 다툼

 

신라의 힘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자연스럽게 마진과 백제는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간에는 서로 남쪽과 북쪽에서 세력 확충에만 열중하던 두 나라는 잦은 충돌 끝에 영토를 다투는 처지가 되었고, 결국 군운을 건 전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로 접경 지역인 충청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국지전을 벌이던 두 나라가 전면전 양상을 띠게 된 것은 궁예가 수군을 이용하여 백제의 금성(나주)을 함락한 뒤부터였다.

 

한반도  북부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백제의 강성을 막기 위해 903년 수군 장수 왕건에게 수천의 병력과 함대를 이끌고 나주를 공격토록 했다. 송악(개성) 바닷가 출신으로 해상전에 능한 젊은 장수 왕건은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 나주를 급습했고, 10여 개 군현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나주는 백제의 도읍 완산(전주)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그야말로 견훤의 턱 밑이나 다름 없었다. 때문에 왕건의 나주 장악은 견훤의 턱밑에 칼을 꼿는 격이었다. 거기다 왕건이 이끄는 막강한 고려 수군에 밀려 해상권마저 내주고 만 처지였다.

 

왕건의 활약은 비단 해상전에 한정되지 않았다. 903년에는 양산 군수 김인훈의 요청을 받아 출병하여 백제군을 패퇴시켰고, 906년에는 장군 금식과 함께 군대 3천을 거느리고 상주 시화진에서 견훤과 맞붙어 몇 번이나 이겼다. 909년에는 견훤이 백제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해 사신을 오월로 보냈는데, 왕건은 그들을 붙잡아 철원으로 압송하는 등 곳곳에서 견훤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 가운데 견훤은 910년에 나주 수복전에 나섰다. 당시 왕건은 철원에서 머물고 있었고, 견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주의 마진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나주성을 급습하여 포위하자, 나주는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했다. 나주 앞바다를 백제 수군이 장악하는 바람에 나주와 개성간의 뱃길이 끓길 정도였다.

 

그 소식을 접한 궁예는 급히 왕건에게 나주를 구하도록 명령했다. 왕건은 풍덕 앞바다에서 출정식을 거행하고 함대를 이끌고 남해 진도로 나아갔다. 왕건이 첯 공격 장소를 진도로 정한 것은 당시 백제의 수군 본부가 진도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진도에서 한 차례 격전을 벌인 왕건은 백제 수군을 크게 격파하고 이내 나주 앞바다로 거슬러올라 고이도에 진을 쳤다. 그 무렵, 나주 앞바다는 백제 수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견훤은 자신이 직접 수군을 지휘하였고, 백제 전함은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저지선을 형성하여 종횡으로 길게 늘어선 진형이었다.

 

하지만 왕건의 해상 전술은 확실히 탁월하였던 모양이다. 백제군은 함선과 병력은 앞서 설명한 대로 긴 종대형의 진형으로 견훤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제군의 사기는 매우 높았고, 마진군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겁을 먹은 상태였다. 왕건 휘하의 장수들도 은근히 겁을 먹고 물러날 것을 종용했다. 그런 부하 장수들에게 왕건은 이렇게 말했다.

 

"근심하지 마라.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의 힘이 일치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다. 그 수가 많고 적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왕건의 눈에 비친 백제 수군은 수만 많을 뿐 대오는 허술하고, 전술도 엉성한 모양이었다. 왕건은 그 허술한 저지선의 대오를 무너뜨린 뒤,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을 구사했다. 그러자 견훤은 왕건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5백여 명의 병력과 많은 전함을 잃고 물러나야만 했다.

 

이 싸움을 정점으로 하여 궁예는 영토와 병력 면에서 모두 견훤을 앞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