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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1 : 고려의 역사 9 (후삼국 실록 2)

두바퀴인생 2011. 5. 16. 02:07

 

 

 

한국의 역사 241 : 고려의 역사 9 (후삼국 실록 2)

 

군웅활거와 후삼국의 성립

 

신라 조정이 사벌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자,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사건이 잇따랐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호족들이 힘을 형성하여 우후죽순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사벌의 아자개, 죽주(안성)의 기휜, 청주의 청길, 북원(원주)의 양길, 중원(충주)의 원희 등이 그 대표적인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지방 호족들로 농민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고, 그 지역의 관아를 장악하는 방법으로 군벌로 성장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들을 모두 도적이라 일컬었다. 이들 외에 초적의 무리들도 많았는데, 그야말로 도적질을 일삼는 무리들 중에서도 제법큰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붉은 바지를 입고 도적질을 일삼던 '적고적'이었다.

 

군벌은 비단 이런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정의 힘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관리들 마저 군대를 독자적으로 운영하여 지방 군벌로 대두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처하다 보니, 조정에서는 반란군을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지방의 군대를 차출하여 그들을 진압해야 했지만, 지방 관리들이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서라벌 경군으로 반란군을 토벌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지역 군벌이 활개치기 시작한 이후로 조정의 힘은 겨우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지방 군벌들이 더욱 세력을 확충하여 서로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힘 싸움 끝에 가장 큰 세력으로 남은 것은 죽주의 기휜과 북원의 양길, 사벌의 아자개 등이었다. 청길, 원회,신휜 등의 중부 세력은 거의 기휜에게 흡수되었고, 서라벌 주변 세력은 아자개에게 흡수되었으며, 양길은 서라벌 북동부(지금의 강원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들 중 서라벌 토벌군과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인 쪽은 사벌의 아자개였는데, 사벌은 원래부터 군사 요충지인 데다가 서라벌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그들은 신라 조정에 가장 위협적인 무리였던 것이었다.

 

아자개의 장남 견훤은 서라벌 서쪽과 남쪽을 휩쓸고 다니면서 몇 달 만에 5천 군대를 형성했고, 백성들에게도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 품을 떠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고, 마침내 혁명 의지를 굳히고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 무진주(전남 광주)를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이르렀다.

 

한편 기휜의 세력은 크게 위축된다. 그의 독단적인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뛰어난 장수 궁예가 청길, 원회, 신휜 등과 결탁하여 양길에게 투항함으로써 기휜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반면에 양길은 궁예를 앞세워 경상도 북부 일대와 강원도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견훤 못지않은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런 상황에서 남쪽으로 진출한 견훤은 892년 완산(전주)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견훤의 창업에 자극을 받은 궁예는 894년 명주(강릉)를 장악하고, 병력 3천 5백을 형성하여 양길로부터 독립한다. 이후 궁예는 강원도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경기도 및 황해도 지역을 손안에 넣는다.

 

궁에는 895년에 휘하 부장들을 중심으로 관직을 설치하여 창업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하였고, 896년에는 송악의 호족 왕륭을 받아들여 태수로 봉하고, 898년 7월에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 소식을 듣고 양길이 분을 참지 못하고 궁예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당해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양길을 물리친 궁예는 그 여세를 몰아 한반도 중북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901년에 고구려(후고구려)를 세워 왕위에 오름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후삼국 구도가 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