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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2 : 고려의 역사 10 (후삼국 실록 3)

두바퀴인생 2011. 5. 17. 01:57

 

 

 

한국의 역사 242 : 고려의 역사 10 (후삼국 실록 3)

 

견훤과 궁예의 세력 확대

 

후삼국 초기의 주도권은 견훤의 백제에게 있었다. 백제는 궁예의 고구려보다 거의 10년이나 먼저 세워진 데다가, 견훤이 장수 출신인 까닭에 많은 관군이 그 휘하로 찿아들었다. 또한 백제가 장악한 전라도 일대는 한반도 최대의 곡창 지대로서 물자가 풍부하였고, 신악 지형이 적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통치가 용이한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견훤은 발빠르게 국가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그가 백제를 부활한 뒤에, 북방의 신진 세력 양길에게 비장 벼술을 내린 여유를 보인 것도 자신의 입지가 튼튼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반면에 궁예는 창업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그가 양길 휘하의 장수였다는 사실이었다. 힘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언제나 양길의 경계어린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탓에 쉽게 창업 의도를 드러낼 수 없었다. 895년 이미 철원으로 도읍을 삼고, 관제를 마련하여 국가의 초기 형태를 갖춘 상태였지만, 그가 왕을 칭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898년에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의 성 30여 개를 더 확보했지만, 그는 여전히 창업을 선언하지 않았다. 세력상으로도 이미 양길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양길과 전면전을 치를 경우에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궁예의 창업을 반대한 무리는 비단 양길 세력만이 아니었다. 기휜 휘하에 있다가 그와 함께 향길에게 투항했던 청길, 원회, 신훤 등도 궁예의 배반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 세 사람은 충청도 일대를 장악한 거대 세력이었고, 그들이 양길과 손을 잡고 협공을 해 올 경우 궁예는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 일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899년에 양길은 그들 세 사람과 힘을 합쳐 궁예를 공격해 왔다. 그들에 밀려 궁예는 한때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반전의 기회를 마련하여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것은 그의 세력 확대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엇다.

 

패퇴한 양길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900년에는 청길, 신훤, 원회마져 모두 양길을 떠나 궁예에게 투항함으로써 비로소 창업을 공포하고 견훤보다 9년이나 늦게 어렵사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견훤과 궁예가 세력을 확대해갈수록 신라의 힘은 점점 쇠락했고, 급기야 서라벌 주면의 성들조차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정의 힘이 너무 미약하여 지방의 성들을 통제할 수 없었기에, 각 성주들은 스스로 자기 성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각각 서라벌 북쪽과 남쪽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신라 왕실을 위협하였다.

 

견훤은 901년 서라벌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서라벌 남쪽으로 가서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그 무렵, 궁예는 경기도와 황해도의 신라 잔존 세력들을 아우르며 국가 기상 확립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개칭하고 이듬해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뒤에 본격적으로 신라에 대한 공략을 전개했다.

 

905년 8월 궁예는 군대를 몰아 죽령을 넘어 단숨에 경북 북부 지역을 장악하였다. 견훤 역시 경상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선(경북 선산) 이남의 10여 성을 손안에 넣었다. 후삼국시대를 세 나라가 쟁패를 다툰 시대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신라는 그저 무력하게 무너지면서 궁예와 견훤의 성장을 두 눈으로 구경만 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너머지 두 나라가 정차 서로 영토를 다투는 양상이었다.

 

견훤과 궁예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신라 땅을 나눠 먹고 있는 사이 서라벌에도 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897년에 색욕으로 난정을 일삼던 진성여왕이 재위 10년 만에 사망하고, 헌강왕의 서자인 효공왕(제52대)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효공왕은 겨우 열다섯 살의 어린 소년이었고, 조정은 그의 장인인 박예겸에 의해 좌지우지됨으로써 그는 이름뿐인 꼭두각시 왕에 불과했다. 이런 현실은 효공왕 사후에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등의 박씨 왕조가 들어서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