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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0 : 고려의 역사 8 (후삼국 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240 : 고려의 역사 8 (후삼국 실록 1)
풍전등화의 천년왕국 신라
신라 문무왕(제30대)이 668년 9월 고구려를 함락시키고 삼한 지역을 통일한 이후, 신라왕조는 창업 이후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삼한통일이라는 국가적 소망을 이룬 신라 왕실은 강력한 지지기반에 힘입어 전제왕권 체제를 획립하였으며, 그에 따라 정치, 사회, 군사, 문화 전반이 매우 안정되어 이른바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반면에 통일 이전에 조정을 주도했던 귀족세력의 입지는 한층 약화되어 성덕왕(제33대)에 이르면 전제정치는 극점에 이르게 되고, 그 정치적 사회적 모순이 점차 누적되어 경덕왕(제35대) 대에 이르러서는 귀족들의 조직적인 반발이 일어난다. 경덕왕은 귀족들의 반발을 해소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시하지만 권력 집중화에 실패하여 왕권은 급속도로 약해졌고, 혜공왕(제36대) 대에 와서는 여섯 차례에 걸친 반란과 친위 쿠테타가 잇따르게 되면서 신라 조정은 친왕파와 반왕파로 갈려 조정은 피비린내 나는 정권다툼에 휘말린다. 그리고 급기야 상대등 김양상(선덕왕, 제37대)이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 조정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란기로 치닫는다.
선덕왕이 아들 없이 재위 5년 만에 죽자, 신하들이 그의 족질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선덕왕과 같이 반정을 일으켰던 김경신(제38대 원성왕)이 폭우를 핑계 삼아 조정 대신들을 조종하여 왕위에 오르면서 조정은 또 한 번 파란을 겪어야 했고, 애장왕(제40대)은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숙부 김언승(제41대 헌덕왕)의 섭정을 받아야 했는데, 김언승이 섭정의 신분을 망각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바람에 귀족들의 불만이 팽배해졌다.
조정이 정권다툼으로 혼란을 거듭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지방 호족들이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822년 웅천(공주)도독 김헌창이 난을 일으켰다. 그는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선덕왕에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왕권에 눈이 먼 권신들 탓이라고 비판하고, 지방 세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켜 독자적인 국호와 연호를 만들기도 하였다.
비록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김헌창의 반란 이후, 신라 전역은 점차 지방 세력의 힘이 강화되어 궁복(장보고)과 같은 독자적인 거대 해상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헌덕왕은 가까스로 그들을 무마하며 정권을 유지하였으나, 그가 죽고 난 뒤 조정은 한층 더 혼란에 빠져 헌덕왕의 아우 흥덕왕(제42대)이 사망한 뒤에는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정권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흥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종제 균정과 오촌 조카 제륭(제42대 희강왕)이 왕위 다툼을 벌이다가, 제륭이 균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김명(제44대 민애왕)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측근들을 살해하지, 희강왕 제륭은 그들에게 살해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목을 메달아 자결함으로써 왕위는 김명의 차지가 되었다.
그무렵, 균정의 아들 우징(제45대 신무왕)은 당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군사 5천을 빌려 서라벌을 공격하였고, 결국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해상왕 장보고 상장과 청해진 설치 및 반란 과정은 얼마전에 방영한 KBS 드라마 '해신'에서 잘 나와 있다. 당시 청해진 군사 5천으로 하여금 빈란을 도모하였는데, 무진주를 점령하고 달구벌을 거쳐 서라벌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동안 신라 관군은 곳곳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장보고의 청해진 군사에게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상태의 군대였다.
그러나 신무왕은 즉위 5개월 만에 등에 종기가 나서 죽었고, 그의 아들 문성왕(제46대)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러나 문성왕은 장보고의 위세에 불안해 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왕이었던 신무왕이 장보고에게 약속하였던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는 문제를 논의 한 결과 귀족.신하들이 장보고의 출신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극구 반대하자,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이에 위협감을 느낀 문성왕이 한동안 고민하고 있던 중, 문성왕은 장보고의 오랜 친구이며 무사였던 염장으로 하여금 장보고에게 보내 환대하는 자리에서 숭이 어느정도 취하자 갑자기의 장검을 뽑아 장보고를 암살함으로써 장보고 군대는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장보고의 난이 수습되자 청해진의 세력인 양순과 홍종의 반란, 연이어 김식과 대흔의 반란을 일으켰다. 문성왕은 잇따라 일어난 세 건의 반란 사건을 경험한 뒤에야 가까스로 청해진을 해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해진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지방 세력은 한층 힘이 강해졌고, 조정은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거의 상실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경문왕(제48대)과 헌강왕(제49대)이 왕권을 회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미 지방 세력은 손을 댈 수가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정강왕(제50대)의 뒤를 이은 진성여왕(제51대)이 즉위하였을 땐 조정의 힘은 거의 무기력한 상태였고, 진성여왕의 난정으로 국가 재정은 파탄지경이었다.
더구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정사를 거의 돌보지 않았는데, 신라 멸망의 촉진제 역활을 한 여인이었다. 즉위 전부터 각간 위홍과 간통하고 있던 그녀는 왕위에 오르자 위홍을 궁중 요직에 앉혀 정사를 돌보게 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는 절망에 빠져 물래 궁중으로 불러들인 젊은 청년들과 음사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진성왕의 총애를 입은 그들은 조정 요직을 독식하면서 뇌물을 일삼고 상벌을 함부로 내려 국가 기강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그 무렵, 관청 거리엔 진성여왕을 비방하는 글귀가 나붙고 범인 색출이 어렵게 되자 왕은 측근의 이야기를 듣고 대야주(합천)의 왕거인을 잡아다가 문초하는 등 민심을 이반시키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그 즈음, 신라 전역이 지독한 가뭄에 시달려 백성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텅텅 비어 있던 국고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고, 진성왕은 전국 각처로 사신을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독촉을 이기지 못한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자, 전국 각처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산마다 도적이 들끌었다.
그런 가운데, 사벌(경북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켯다. 조정에서는 내마 영기에게 병력을 내주고 반군을 토벌하려 했으나, 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영기는 사벌 진압에 실패하였고, 그 사이 사벌 촌주 우연이 반군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진성왕은 영기를 참수하고 갓 열 살이 된 우연의 아들을 사벌 촌주로 새로 임명하여 출전시켰으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였다.
결국 사벌 봉기의 성공은 민심 저변에 깔려 있던 불만을 폭발시켜 천년왕국 신라의 쇠망을 재촉하는 혁명의 들불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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