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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5 : 고려의 역사 13 (후삼국 실록 6) 본문
한국의 역사 245 : 고려의 역사 13 (후삼국 실록 6)
왕창근의 거울과 왕건의 반정
호족들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궁예는 반발 세력에 대한 기혹한 정책을 일삼았고, 그에 따른 불안감도 자연스럽게 역모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그가 죽인 숱한 신하들 중에 역모 혐의를 쓰고 죽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듯 궁예가 역모에 대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918년 3월, 왕창근이라는 상인이 묘한 내용의 글이 새겨진 겨울을 들고 궁예를 찿아왔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삼수 가운데와 사방 아래 상제께서 아들을 진마에 내려보냈다.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칠 것인즉, 이를 일러 운수가 일삼갑에 찿다고 할 것
어둠이 하늘에 오르고 밝음이 땅을 다스릴 것이니, 자년이 되면 대사를 이루리라
종적과 성명이 혼돈을 이루나니, 혼돈 속에서 누가 진실로 성스러운 일을 일으킬줄 알리요
법을 움직여 뇌성을 일으키고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며, 사년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난다.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의 동쪽에 모습을 나타내리.
지혜로운 자는 볼 것이나 우매한 자는 보지 못할 것이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거느리며 사람들을 일으켜 정벌하리라.
때로는 성하고 때로는 쇠할 것이니, 성쇠가 모두 악의 잔재를 없애기 위함이니라.
이 한쪽 용의 아들 서넛이 서로 대를 바꾸어가며 여섯 갑자를 계승하리라.
이 사유에서 기필코 축을 멸하고 바다를 건너와 융성하리니 반드시 유를 기다려라.
이 글을 만약 현명한 임금에게 보이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제왕의 길이 번창하리.
나의 기록은 모두 일백사십칠 자이니라."
왕창근은 제법 글줄이나 읽을 줄 아는 선비를 찿아가 그 글을 해석케 했는데, 글을 읽어 본 선비가 거울을 왕에게 바치면 크게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왕창근이 궁예에게 그 거울을 바치려 온 것이다. 궁예가 글귀를 유심히 살펴 보았지만, 쉽게 그 뜻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창근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이 거울을 얻었느냐?"
왕창근이 왠 노인이 팔고 갔다고 설명하자, 궁예는 그에게 병사를 붙여주면서 그 노인을 찿아오라 했다. 하지만 왕창근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그 노인을 찿았으나 좀처럼 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달포 만에야 한 거지로부터 노인에 관한 말을 듣게 되었다. 그 거지는 노인에게서 쌀을 얻은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노인이 쌀을 나눠주면서 "나는 발삽사 여래불이 보내서 왔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왕창근이 그 말을 듣고 발삽사로 찿아갔는데, 그곳 여래불상 앞에 토성을 맡은 신상이 있었는데, 영락없는 노인의 형상이었다. 토성신상의 왼손에는 세 개의 도마가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거울이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왕창근은 거울을 들고 왔던 노인이 토성신의 환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궁으로 가서 궁예에게 알렸다.
창근의 보고를 접한 궁예는 그 거울에 적힌 내용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몇 번이나 읽어 보았지만,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밀히 송사홍, 백탁, 허원 등 당대 석학들을 궁궐로 불러들려 글귀를 해석토록 했다.
세 학자가 거울에 새겨진 글귀를 해석해보니, 그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엇다. 그들은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삼수중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 땅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뜻이며, 또한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숲에 모습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은 청목은 소나무니 송악을 일컫고, 흑금은 철을 이른 것이니 철성에 기반을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송사홍이 먼저 그런 해석을 내리자 백탁이 맏았다.
"그렇다면 두 용이란 송악 출신의 왕건과 철성에 머물고 계신 페하를 일컫는 것 아닙니까?"
그렇소이다."
"어허, 이거 또 한 번 피바람이 일게 생겼소이다."
"특히나 이글에 따르면 '축'이 멸하고 '유'가 일어난다고 했으니, 이는 정축년에 태어난 폐하가 멸하고, 정유년에 태어난 왕대인이 일어난다는 뜻 아니오이까? 이 내용을 폐하께서 아시면 당장 왕대인을 죽이려 들 것인데, 이를 어쩌면 좋소?"
세 학자는 논의 끝에 해석을 적당히 꾸며 왕건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궁예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이미 역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궁예는 아무래도 왕건을 불러 다짐을 받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건을 불러 이렇게 다그쳤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이 말에 왕건은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꿰똟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똟어 보리라."
궁예는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렀다.
이때 장주 최응이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 집니다."
이 말을 듣고 왕건은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하였다.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왕건의 이 말에 궁예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궁예는 기꺼워하며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왕건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
고려사는 왕건이 이렇듯 거짓으로 모반 계획을 인정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궁예는 처음부터 왕건을 죽일 계획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왕건을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궁예는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궁예의 행동은 왕건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고, 역모의 뜻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던차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찿아와서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유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왕건이 군사를 몰고 왕성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싸워 봤자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변목을 하고 왕성을 몰래 빠져나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산야를 전전하다가 강원도 평강에서 살해되었다.
918년(무인년) 6월 병진일, 왕건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라고 하고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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