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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49 : 고려의 역사 17 (후삼국 실록 10)

두바퀴인생 2011. 5. 24. 04:39

 

 

 

한국의 역사 249 : 고려의 역사 17 (후삼국 실록 10)

 

국운을 건 명승부들

 

공산 대첩

 

-피눈물을 흘리면서 달아나는 왕건-

 

대야성 함락에 분통함을 이기지 못한 견훤은 보복을 다짐하며 환갑에 이른 노구를 이끌고 출정식을 거행했다.

 

보복전에 나선 견훤은 그해 9월 근품성을 회복하고, 신라 고을부(경북 영천)를 습격하엿으며, 이내 북상하던 진로를 바꿔 서라벌로 군대를 몰았다. 신라의 경애왕(제55대)은 다급한 마음으로 장군 연식을 고려에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서라벌에 입성한 견훤은 곧장 신라 궁성으로 달려갔다. 그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삼국사기에서는 잔치를 벌이고 잇었다지만, 실제는 잔치가 아닌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포석정은 잔치를 벌이는 장소가 아니라 제사를 올리는 곳이라는 학설에 근거하고 있으며 국란이 위급한 순간에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신라 멸망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으로 삼국사기의 편자 김부식이 과장하여 표현한 기록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느닷없이 백제군이 출현하자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던 경애왕과 왕비는 궁성 남쪽 별궁으로 몸을 숨겼다가 붙잡힐 것을 우려하여 자살하였다.(고려측 기록에는 견훤이 경애왕을 찿아내어 자살을 강요하고, 왕비를 강간하였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에는 경애왕이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측 기록은 견훤을 부도덕한 인물로 몰아세우기 위해 견훤의 행위를 왜곡시켰을 것으로 판단되어 견훤의 해명을 더 존중했다). 그러자 견훤은 신라 국상 김웅렴을 잡아 죽이고,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를 왕(제56대 경순왕)으로 세웠다. 또한 그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 잡아 귀환길에 올랐다(견훤이 국상 김웅렴을 죽인 것은 경애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고 실질적인 실권자는 국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의 구원군 1만 대군이 서라벌에 도착했을 때, 견훤의 군대는 이미 서라벌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 소식을 접한 왕건은 백제군이 멀리 달아나지 못햇을 것으로 판단하고, 좌우에 신숭겸과 김락을 세우고 자신이 직접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 동수(대구 근방)로 달려갔다.

 

왕건은 견훤이 공산(팔공산) 길을 택해 돌아갈 것으로 판단하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급습을 가할 요량이었다. 휘하 병력을 모두 기병으로 구성한 것을 보면 왕건이 급하게 달려 갔음이 분명하다. 공산에 먼저 도착하기만 하면 견훤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급하게 서두른 것이 화근이 되었다. 먼저 도착하여 길목을 막고 백제군의 머리르 치겠다는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오히려 머리를 맞은 쪽은 고려군이었다.

 

선봉대를 이끌고 달려갔던 김락이 견훤의 전술에 휘말려 목숨을 잃자, 고려군은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백제군의 포위망에 완전히 걸려든 것이었다. 급기야 이리저리 달아날 길을 모색하다 도피할 구멍을 찿지 못하자 왕건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왕건이 근심에 빠져 있을 때 신숭겸이 와서 자신이 왕의 갑옷을 입고 어차에 올라 싸울 터이니, 그 사이 빠져나가도록 간했다. 

 

주저하던 왕건을 주변의 장수들이 간곡히 설득하자, 왕건은 눈물을 머금고 신숭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왕건이 변목을 하고 단신으로 백제군의 포위망을 빠져 나가고 있을 때, 신숭겸은 어차를 타고 견훤을 향해 돌진하다가 5천의 병사들과 장렬하게 전사했다.

 

신숭겸의 외모가 왕건과 흡사했고, 또한 그가 왕건의 갑옷을 입고 어차에 올라 있던 탓에 백제군은 처음에 왕건의 목을 얻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알고보니 수하 장수 신숭겸이라는 사실을 알고 견훤은 왕건을 놓친 안타까움에 땅을 쳤다. 운명의 길은 여기서 갈라진 듯하다.

 

천신만고 끝에 송악으로 돌아온 왕건은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5천의 정예 병력과 수족처럼 여기던 두 장수를 잃은 왕건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한동안 시름에 빠져 지냈다. 고려 조정도 사기가 저하되었고 병사들도 침울해졌다.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났는데 고려군의 연전연패였다.

 

공산대첩 이후, 고려군은 여러 전장에서 잇따라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이듬해인 928년 정월에 강주를 구원하려 가던 원윤 김상이 백제 장군 흥종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5월에는 강주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강주 원보 진경이 죽고 장군 유문이 항복하였으며, 8월에는 어렵게 얻었던 대야성이 백제 장수 관흔의 수중에 들었고, 죽령 또한 백제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11월에는 부곡성이 함락당해 장군 양지와 명식이 백제에 항복했으며,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직접 병력 5천을 이끌고 와 고려의 주요 거점인 의성부를 공격했다.

 

이 때 성주 장군 홍술이 전사했는데, 홍술은 처음 왕건이 찬탈했다면서 등을 돌렸다가 왕건의 끈질긴 회유와 설득을 받고 922년 마음을 돌린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의 남진정책의 교두보 역활과 신라와 고려의 교량 역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건은 "내가 좌우 손을 잃어 버렸다."고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