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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50 : 고려의 역사 18 (후삼국 실록 11) 본문
한국의 역사 250 : 고려의 역사 18 (후삼국 실록 11)
국운을 건 명승부들
병산싸움(930년 1월)
-낙동강에 한을 뿌리고 돌아선 견훤-
여기저기서 고려군이 무기력하게 무너지자 기세를 올린 견훤은 북진을 계속하여 경상도 지역에 있어서 고려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고창(안동) 공략을 준비한다. 이를 위해 견훤은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죽령을 장악하고, 문경과 상주에 주둔한 고려군의 발을 묶었다.
견훤이 안동을 공격할 의도를 드러내자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죽령 길을 뚫고, 경북 영주와 풍기 등을 순시하며 견훤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백제군의 기세가 위낙 강해 왕건은 이내 죽령을 넘어 퇴각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929년 12월, 견훤이 마침내 고창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고창의 고려군 3천이 이미 견훤의 대군에 포위당한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왕건은 쉽사리 고창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그창 주변은 완전히 백제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대응책에 부심하던 왕건은 여러 방책을 강구하였으나 뽀족한 타개책을 찿지 못하고 있었다.
왕건은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구하였다. 하지만 홍유와 공훤이 왕건의 출전을 강력하게 만류했다. 죽령을 넘어갔다가 패배하는 날에는 돌아오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미 공산 전투에서 크게 당해 두 장수까지 잃은 터라 왕건은 그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출전을 포기하려 했는데, 유금필이 강력하게 출전을 권유했다.
"무기는 흉악한 도구이고, 전쟁이 위험한 것은 당연합니다. 때문에 살고자 하기보다는 죽자는 결심을 해야만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싸우지도 않고 패배부터 염려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는다면 고창의 3천 아군은 고스란히 적에게 내주는 것이니, 어찌 절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왕건은 유금필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여 결국 죽령을 넘었다.
그때, 그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는데, 신라 재암성 (경북 진보)의 신라 장군 선필이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온 것이다.
고려군에게 선필의 귀순은 남다른 의미가 잇었다. 홍술이 전사한 뒤로 고려군은 주변 지리에 밝고 그곳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장수가 없었다. 때문에 전술적인 면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때마침 선필이 귀순해온 것이다.
선필을 얻은 왕건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세를 세우며 고창으로 진입했다. 고창에 진입한 왕건은 병산에 진채를 내리고 대오를 형성하였고, 견훤은 그곳에서 5백 보 떨어진 석산에 주둔했다.
기세로 보나 병력으로 보나 한 수 위에 있던 견훤이 드디어 말을 몰아 병산을 덮쳣다. 그러나 고려의 선봉장 유금필의 위용에 눌려 백제군은 패퇴를 거듭했다. 거기다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이끌던 신라군까지 가세하여 협공을 가해왔다.
싸움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어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과는 견훤의 참담한 패배였다. 시랑 김악이 포로로 잡히고, 병력 8천을 잃는 대패를 당한 채, 견훤은 낙동강을 넘어 퇴각해야만 했다.
대승을 거둔 왕건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경순왕에게 승전보를 알렸고, 경순왕 또한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자 강릉에서부터 울산에 이르는 신라의 110여 성이 투항해왔다. 그 여세에 힘입어 왕건은 대목(경북 칠곡), 인동(경북 구미)을 순시하며 그 주변 호족들의 인심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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