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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2 : 발해의 역사 25 (발해의 역사 종합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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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2 : 발해의 역사 25 (발해의 역사 종합 1)

두바퀴인생 2011. 4. 24. 04:21

 

 

한국의 역사 222 : 발해의 역사 25 (발해의 역사 종합 1)

 

 

고구려 멸망에서 발해의 건국에 이르는 과정은 안동도호부의 역사와 일치한다. 당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는 동시에 옛 고구려 지역 전체를 기미주로 편제하고 영역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677년 이후 그 지배영역은 요동 지역으로 축소되고, 지배방침도 간접통치에서의 기미지배로 전환되었다. 보장왕의 모반이 실패한 것은 안동도호부의 기미지배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은 681년 보장왕을 비롯하여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내륙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대조영과 걸사비우 집단이 영주로 이주한 시점은 고구려 멸망 직후가 아니라 바로 이때였다. 대조영이 고구려인임에도 불구하고 말갈이라는 단서가 붙은 것은 당시 고구려인이 내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던 반면에 말갈족은 대개 영주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696년 영주에서 일어난 이진충의 난은 요동까지 파급되었다. 거란은 남하하는 한편 배후의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동쪽으로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안동도호부는 요동 지역의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각 기미주는 독자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이 요동을 공격할 때 참여하였던 대조영과 걸사비우 집단은 거란이 와해되자 요동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당은 698년 안동도호부를 폐지하고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에게 요동 통치를 위임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집단이 귀순하도록 회유하였다. 그러나 회유가 실패하자 당은 토벌에 나섰던 것이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한 대조영은 연이은 당의 토벌을 피해 동모산으로 동주하여 발해를 건국하였다. 이 무렵 안동도호부는 안동도독부로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요동 지역은 기미주 단위의 자치 상태로 넘어가게 되었다. 도호부의 철폐라는 차원에서 결국 당은 요동 이동의 옛 고구려 지역을 사실상 포기하기에 이른다.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을 때 국호는 진국(振國)이었다. 당은 영역내에서 이탈하여 독자 세력을 구축한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말갈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당시 당의 급선무는 돌궐 휘하의 거란으로부터 영주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란 배후에서 세력을 확장해 가는 진국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은 안동도호부를 부활시키고 유주절도사를 설치하는 등 동북방면의 변방정책을 강화하는 가운데 진국과 접촉하여 713년 비로소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때 당은 대조영은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홀한주도독에 책봉하였지만 그가 자칭한 진국왕은 인정하지 않았다. 당은 반란 세력을 명분상 인정할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 그 실체를 인정하고 자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편입시켜야 했다. 따라서 국내의 관직과 봉작을 대조영에게 제수함으로써 관념과 현실의 부조화를 일치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발해군왕이란 책봉호에는 대조영의 진국이 발해만 건너에 위치하기 때문에 배후에서 거란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당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말해 무왕은 주변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나갔다. 그 결과 동북방면의 흑수말갈과 남쪽의 신라가 각각 당과 결탁하였다. 그리고 당은 거란 토벌에 동조하지 않는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대내적으로 흑수말갈 토벌을 놓고 무왕 의 동생 대문예가 반발하여 당으로 망명함으로써 발해의 지배층은 분열되었다.

 

이처럼 무왕은 대내외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732년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구국에서 현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대내적으로 말갈제부의 복속 편제와 이를 뒷받침할 체제정비의 필요성, 대외적으로 발해를 지지하던 돌궐 및 거란의 약화와 당을 지지하는 신라의 위협 등으로 대당 강경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즉위한 문왕은 대당관계의 개선을 시도한 끝에 당의 책봉을 받았다. 이때 문왕은 대문예의 망명 이후 숙청된 친당파를 사면하였다. 문왕대 체제정비를 주도한  세력은 바로 이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건국집단 출신의 반당파는 점차 정국에서 소외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