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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0 : 발해의 역사 23 (발해의 멸망 1) 본문
한국의 역사 220 : 발해의 역사 23 (발해의 멸망 1)
제15대 대인선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 ? ~ ?, 재위: 906년 ~ 926년)은 발해의 제15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제13대 왕 대현석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고 알려졌지만, 김육불이 그의 저서 《발해국지장편》에서 대위해가 발해 제14대 왕이었으므로 대인선이 대위해를 이어 다음 왕이었다고 주장했다. 시호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대현석을 경왕, 대인선을 애왕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신라의 경애왕과 혼동하여 잘못 만들어낸 오류이다.
발해의 최후
대인선의 재위시에 국제정세는 빠르게 변화되어 가고 있었다. 당나라에선 황소와 안녹산의 난으로 국력이 약해졌다. 이때 주전충이 당 애제를 쫓아내고 직접 황제가 되어, 후량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한편, 신라에서도 지방 호족들과 농민 반란군의 항거가 거세졌다.
한편, 거란족은 7세기 전·후반에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당나라 내부에서 거듭된 혼란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들은 야율아보기를 추장으로 삼고, 동쪽과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대인선은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발해 내부의 거듭되는 귀족세력의 권력쟁탈전으로 지도력을 많이 상실했다. 한편, 대인선은 고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거란군이 발해를 공격해 포로를 잡아갔으나 인선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포로들을 되찾아왔다. 이로 인해 야율아보기는 크게 분개하여 결국 925년 겨울, 거란이 침공했고 단 10여 일 만에 상경용천부 홀한성이 포위되었다. 발해인들은 거란과 맞섰으나 패배하였고, 926년 발해는 멸망하고 말았다.
야율아보기는 처음엔 그를 정성껏 대접했다. 그러나 대인선이 남아있는 발해 군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야율아보기는 화가 나서 그를 압송했다. 그리고 대인선에게는 자신의 애마 오로고의 이름을 따서 "오로고"로, 대인선의 비는 자신의 부인 소황후의 애마의 이름'아리지'로 따서 이름 붙였다.
한편, 발해의 태자 대광현은 926년 정월에 고려로 귀순하였다.
발해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은 200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후일에 발해유민들은 정안국, 후발해국, 흥료국 등의 나라를 세우지만 모두 거란에게 멸망당했다.
발해인들의 부흥운동
비록 대인선의 항복으로 발해는 멸망했지만 발해인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유득공의《발해고》에 따르면 10세기 중엽부터 12세기까지 발해인들이 거란에게 대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발해국과 정안국, 흥료국, 대원국은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대표적인 나라이다.
후발해는 건국 년도와 멸망 년도가 일정하지 않다. 정안국은 936년경에 건국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안국은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거란과의 마찰을 두려워한 고려에서 관계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고려와의 교류는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985년 정안국은 거란의 압박으로 멸망하였다. 대원국은 12세기에 세워졌고, 발해 부흥 세력 중 처음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후 발해부흥운동은 종식되었다.
가족관계
참고
발해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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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상) · 고왕 · 무왕 · 문왕 · 대원의 · 성왕 · 강왕 · 정왕 · 희왕 · 간왕 · 선왕 · 대이진 · 대건황 · 대현석 · 대위해 · 대인선 |
발해의 멸망 1
'거란국지'에 의하면 거란이 해를 병탄하자 발해는 위기를 느끼고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은밀히 군사적 원조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요사 태조 본기에 의하면 거란은 두차례 해를 토벌하였다. 즉 911년 1월 해와 습을 병탄하였고, 923년 3월에는 이반한 해를 토벌하여 타괴부를 설치하였는데, 해의 토벌을 어느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발해가 신라 등에 사신을 파견한 시기도 911년 또는 923년으로 의견이 엇갈린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따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후자는 918년 발해가 거란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양국관계가 대립적이지 않았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911년 거란이 해와 습을 병탄한 후 그 영역이 동쪽으로 바다에 도달하였다는 점, 그리고 거란이 908년부터 요동 진출을 모색하는 행보를 보인 점 등을 감안하면, 발해로서는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발해가 신라 등 주변국과 군사적 원조관계를 추진했다면, 당연히 신라 등도 거란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발해의 요청을 계기로 국제정세의 변화를 감지한 신라와 고려(태봉)가 압록강까지 진출한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보아도 무리한 추정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시기를 911년 이후로 본다면, 912년 5월 발해가 후량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도 마찬가지엿을 것이다. 거란이 완충지대인 요동 지역에 출몰하는 것은 기존의 국제질서를 교란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발해는 후량과 신라 등 주변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때까지 발해와 거란간에는 대립이 전면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919년부터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해 2월 거란은 요양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면서 영역화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921년 12월에 이어 924년 5월 거란이 좀더 북쪽으로 요주까지 진출함에 따라 마침내 발해의 위기감은 폭발되어 요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거란은 924년 7월 발해를 공격하다가 두 달 후 퇴각하였는데, 그 이유는 거란이 여진.회골.실위 등에게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진 등의 거란 공격이 발해의 외교술 때문이라면, 발해는 거란의 요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선제 공격과 외교 전략을 총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동을 둘러싼 거란과 발해의 대립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결국 거란은 발해와 전면전을 준비하여 먼저 서하를 정벌한 뒤에 발해를 공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거란은 925년 윤 12월 29일 발해에 대한 총공세를 선포하고 곧바로 부여부로 진격하였다. 요사 태조본기에 의하면, 거란은 9일 동안 1,000여 리를 행군하여 부여부를 포위하였고, 3일만에 함락시켰다. 그리고 발해의 지원군 3만 대군마저 격파하고 6일만인 이듬해 정월 9일 발해의 수도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결국 발해는 항복하였다.
아무리 거란이 유목민족 특유의 기동성을 발휘하였고, 또한 부여부에서 홀한성까지 비교적 평탄한 지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발해가 그렇게 쉽게 망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거란의 총공세가 종래 국지전이 벌어졌던 요동 방면이 아니라는 점에서 볼 때, 거란이 9일 만에 1,000여 리를 달려 3일만에 부여부를 함락시켰다는 것은 발해가 요동 지역에 치중한 나머지 허를 찔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그래도 적의 대군이 1,000여 리를 달려오는 동안 도중의 수많은 발해 군사 기지와 지방 관아가 산재하였을 것인바, 그러한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조정에도 미리 알리지 못했다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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