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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9 : 발해의 역사 22(거란의 요동 진출 ) 본문
한국의 역사 219 : 발해의 역사 22 (거란의 요동 진출)
거란의 요동 진출
9세기 중반까지 해동성국을 구가하던 발해가 10세기초에 발흥한 거란의 공세에 별다른 저항없이 일격에 무너졌던 것은 발해사에서 큰 의문거리 중 하나이다. 이로 인해 발해 멸망기의 대외관계나 멸망 원인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멸망 원인의 추구는 해당 국가의 멸망이라는 결과론적 시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지배층의 잘못이나 무능, 국가체제의 모순이나 약점 등이 과도하게 부각되는 경향도 있다. 그로 인해 마치 국가는 애초부터 망국의 원죄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쉽다. 멸망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요소들이 그 국가가 지속 또는 발전할 때는 없었는지, 또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등도 함께 감안할 때, 멸망 원인의 분석이 단죄론적 시각에서 벗어나 오히려 해당 국가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데 발해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상층의 고구려계와 하층의 말갈계로 이원화된 주민 구성에서 찿는 견해가 그것이다. 즉 상층과 하층이 유리되어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란의 일격에 별다른 저항없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해가 주변 말갈제부를 복속.통합해 가며 발전한 점을 감안한다면 종족적 이원성은 반농반렵에 기반을 둔 발해 사회의 특징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발해 멸망의 원인은 역사적 전개 과정과 사회 성격에 대한 총체적인 파악 위에서 그 해답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는 발해 사회의 성격보다 발해사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에 초점을 맞춘 만큼 그 연장선상에서 거란의 공격과 발해의 대응 양상을 중심으로 발해의 멸망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른바 소고구려가 요동에 존재했다는 견해를 제외한 대부분의 연구에서 요동이 발해의 영역이었다는 전제에서 거란의 요동 진출을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24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발해가 특별한 반응을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우선 거란의 요동 진출 과정을 중심으로 발해를 비롯한 주변국의 동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거란의 요동 진출과 발해의 멸망에 이르는 과정을 네 시기로 구분해 보면,
제1기는 903~908년 1월까지로 거란이 동북방면으로 처음 진출하였다. 야율아보기는 901년 질랄부의 이리근이 된 후 본격적으로 대외정벌을 담당하였는데, 동북방면으로는 903년 봄과 906년 11월에 각각 여진과 동북여진을 토벌하였다. 여진은 발해 멸망 후 말갈제부에 대한 명칭이므로 이때 등장하는 것은 요사 편찬자가 소급해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여진은 발해 부여부의 서남쪽 창도.개원 방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거란은 시라무렌을 따라 요하 상류로 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2기는 908년 11월~915년 10월 사이로 거란은 동북방면에서 동남쪽으로 선회하여 요동에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즉 야율아보기는 908년 11월 요서 연안의 진동해구에 장성을 축조한 이후 요하를 건넜으며, 915년에는 압록강까지 낚시하러 갔다. 이때 신라와 고려가 그에게 사신을 파견하였던 점은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 거란은 요동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제3기는 918년 2월-925년 11월로 거란은 요동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이때까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발해는 918년 2월 처음으로 거란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주목된다. 아마도 거란의 요동 진출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919년 2월 요양 고성을 수리하고 한(漢)족과 발해민을 이주시킨 뒤 동평군으로 개명하였으며, 뒤이어 921년 12월과 924년 5월에도 하북 지역민을 이주시켰다. 주민의 이주는 거란이 요동을 영역화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이었다. 결국 발해는 924년 5월 요주를 공격하여 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백성들을 약탈하였고, 이에 거란이 반격에 나서는 등 거란과 발해의 물리적 충돌로 확산되었다. 924년과 925년에 네 차례나 발해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925년 고려와 신라가 다시 거란에 사신을 파견한 것도 요동의 정세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양국의 충돌은 결국 제4기 925년 12월- 926년 1월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끝났다. 925년 윤12월 발해에 대한 총공세에 나서 9일 만에 부여부를 함락시키고, 발해의 3만 지원군마저 격파하였다. 그리고 6일 만에 수도 홀한성, 즉 상경성으로 직공하여 포위하니,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항복하였다.
이처럼 거란은 처음 시라무렌을 따라 요하 상류로 진출하였다가(제1기), 908년 무렵부터는 동남쪽으로 방향을 선화하여 요동 진출을 모색하였고(제2기), 919년부터는 요동 지역을 적극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발해와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제3기). 급기야 925년 발해와 전면전으로 치달았다(제4기). 그런데 처음 동북쪽으로 진출하였던 거란이 제2기에 동남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이유와 이때 발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제1기에 보이는 여진과 동북여진은 발해 부여부의 서남쪽 창도.개원 방면에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런데 신당서 발해전에 의하면 발해는 서북방면에 부여부를 설치하고 경병을 두어 거란에 대해 방비하였다. 즉 사방 국경 가운데 발해가 유일하게 군사를 배치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구에 의하면 발해는 756년 상경으로 천도한 문왕 후기에 중앙정치기구와 지방통제제도를 마련하였으므로, 부여부의 설치도 이때였을 것이다. 발해는 건국 이래 무왕대까지 대당관계에서 돌궐 및 거란과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나 돌궐의 붕괴와 거란의 이탈 등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 문왕은 적극적인 친당정책으로 전환하며 지배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따라서 부여부의 설치와 거란의 방비를 위한 경병 주둔은 대외정책의 전환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었다.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 발해를 친정할 때 발표한 조서에서 '발해는 대대로 원수인데 아직 갚지 못했다'고 한 것은 이 점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거란이 동북쪽으로 진출하였다가 요동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은 발해 부여부에 배치된 경병 때문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909년 야율아보기의 요동 행차나 915년 압록강에서의 낚시 및 신라, 고려의 사신 파견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즉 거란이 918년 요양을 차지하기 훨씬 이전에 요동이나 압록강까지 진출한 것은 믿기 어려우며, 더구나 918년 6월 건국한 고려가 3년 전에 거란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의 고려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부활을 표방한 궁예의 태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한편 앞에서 검토하였듯이 요동은 당의 영역도 발해의 영역도 아니었으므로, 이 지역은 완충지대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거란이 몇 차례 하북 지역민을 강제 이주시켰다는 것은 요동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반도 서북부에서 요동 지역까지가 완충지대였으므로 야율아보기는 압록강까지 나아갈 수 있었고, 신라와 고려(태봉)은 완충지대를 둘러싼 미묘한 변화를 파악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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