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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7 : 발해의 역사 20 (완충지대로서의 요동 1) 본문
한국의 역사 217 : 발해의 역사 20 (완충지대로서의 요동 1)
완충지대로서의 요동 1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는 동시에 전 지역을 기미주로 편제하고 영역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의 반당투쟁 및 나당전쟁의 여파로 676년 요동성을 거쳐 677년 신성으로 퇴각하였다. 그에 따라 지배영역은 요동 지역으로 축소되고 지배방침도 간접통치로 전환되었다.
696년 요서의 영주에서 일어난 이진충의 난은 요동까지 파급되어 안동도호부는 휘하의 기미주에 대한 통제력까지 상실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조영 집단과 걸사비우 집단이 요동으로 이동하여 독자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발해 건국을 전후하여 기능을 상실한 안동도호부는 698년 6월 안동도독부로 격하됨으로써 요동 지역은 기미주 단위의 자치 형태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과 발해로 달아났다. 이 점은 발해가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안동도독부는 705년 다시 안동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안동도호를 유주와 영주의 도독이 겸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안동도호부를 부활시킨 이유는 영주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안동도호부는 줄곧 요서 지역에서 이동하다가 757년 이후 폐지되었다. 안동도호부의 폐지는 당이 실질적으로 요동 지역에 대한 통치를 포기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서쪽으로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정치적으로 무주(無主) 지역이나, 변경 지역을 의미하는 구탈 또는 완충지대로 파악되었다.
여기서 잠시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던 평양 지역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새롭게 행정조직인 9주와 지방군사조직인 10정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여기애 한강 이북 지역은 제외되었다. 9주는 기존의 신라 영역에 3주, 백제 영역에 3주, 고구려 남쪽 영역에 3주를 설치하였는데, 한주.삭주.명주 등 북쪽의 3주는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정벌 과정에서 획득한 지역이 아니라 이미 진흥왕 대에 점령한 곳이었다. 또한 지방군사조직인 10정은 9주를 기준으로 하여 각주에 하나씩 설치되었으나, 한주는 지역이 넓고 국방상 요지였기 때문에 남천정(지금의 경기도 이천)과 골내근정(지금의 경기도 여주) 2정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서북 방면의 중심이 전반적으로 한강 이남에 치중되었다. 신라가 예성강까지 진출한 것은 이로부터 10년이나 지나서였다. 따라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북부 일대는 신라나 당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공백지대였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발해의 등주 공격에 대해 당은 733년 신라에게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도록 요구했고, 실패를 맛본 신라가 이듬해 다시 발해를 공격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당은 735년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신라에게 인정하였으며, 뒤이어 신라가 당에 감사의 표문을 올렸다. 이러한 사실은 안동도호부가 철수한 뒤에도 이 지역이 명목상 당의 지배영역으로 인식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패강 이북에서 요동반도에 이르는 지역도 마찬가지였음에 틀림없다.
당이 표방한 자기 중심의 세계질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실현되는듯 하였으나 이내 나당전쟁에서 패배하고 발해의 건국으로 퇴색되어 버렸다. 이념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당은 더 이상 신라와 발해에게 자기 중심의 세계질서를 강압적으로 요구할 수 없었고, 신라와 발해 역시 당과의 대립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상호간에 충돌을 피하는 완충지대를 필요로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신라와 당의 완충지대는 나당전쟁 이후 방기되었던 평양 일대였으며, 발해와 당 사이에는 안동도호부 철폐 이후 요동 일대가 그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발해는 당과의 충돌을 피하며 주로 동북방면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안동도후부가 안동도독부로 격하된 이후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가 안동도독으로 파견되었으며 차츰 세력을 이루어 당에 악공을 바쳤다는 기록 등은 요동 지역에 고씨가 독자적인 정치체를 수립한 것처럼 보인다. 안동도호부가 요서에 있고 발해가 요동에 진출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기록을 근거로 699-918년까지 요동에 이른바 '소고구려'가 존속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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