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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8 : 발해의 역사 21 (완충지대로서의 요동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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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8 : 발해의 역사 21 (완충지대로서의 요동 2)

두바퀴인생 2011. 4. 20. 07:45

 

 

 

 

 

한국의 역사 218 : 발해의 역사 21 (완충지대로서의 요동 2)

 

  

완충지대로서의 요동 2

 

 

 

논지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소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안정을 위해 당이 세운 국가이으로, 그 영역은 안동도호부의 그것과 일치하였다. 당은 평로절도사를 통해 소고구려를 통제하였지만, 안사의 난 이후 평로절도사가 몰락함으로써 소고구려는 발해에 점령되어 자국화되었다. 그렇지만 발해는 끝내 이 지역을 직접 통제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소고구려의 고씨 왕통이 속말말갈 출신의 발해 대씨 왕통의 옛 주인에 해당되고, 발해 내부에서도 고씨가 지배층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란이 918년 요동에 진출한 것은 바로 소고구려에 대한 정벌이었다. 

 

발해가 소고구려를 직접 지배하지 않은 이유가 과거의 주종 관계 때문이라는 부분은 언급할 가치도 없거니와 이 견해의 치명적인 약점은 725년 당 현종이 행한 태산(太山)에서 행한 '봉선행사(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당 최대의 제천의식, 당의 영향력에 있던 주변국, 제후국 국왕들이 모두 참석)'에 고려조선왕이 백제대방왕 등과 함께 내신지번으로 참석한 사실이다. 이에 따르면 이른바 소고구려의 왕이 요동이 아니라 당 영역 내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요동의 소고구려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렇지만 이 견해는 이후 요동이 발해의 영역이었다는 견해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므로 이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자.

 

'구당서'와 '통전' 사료에 의하면 8세기 중반 당의 사방 영역을 전한과 비교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때 안동도호부는 요서 지역에 있었으므로 당의 동쪽 끝은 한대보다 축소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점은 기본적으로 당연하다. 한의 영역이었던 낙랑과 현도는 지금 고려와 발해가 차지하여 요동에 있으므로 당의 영역이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요동이 당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발해와 병칭된 고려는 요동의 독자적인 정치체, 즉 소고구려가 존재한 것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한편 통전에서는 안동도호부는 한대 요동군이 있던 곳이며 한대 현도.낙랑군은 요동군의 동쪽에 있었지만 지금은 동이 지역이 되었다고 하여, 요동이  당의 영역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를 다시 기술하면 이렇다. "한대의 동쪽 경계는 낙랑.현도군에 이르는데, 지금은 고려. 발해의 땅이다. 지금 동쪽 경계는 한대 요동군 지역에 있고 그 동쪽은 당의 영역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즉 752년 시점에서 요동은 당의 영역 안에 있고 고려는 그 동쪽에 있으므로, 요동에 소고구려가 있었다는 견해에 부정적인 사료가 된다. 그렇다면 안동도호부는 요서에 있으면서 요동 지역을 관할하에 두었다는 것이 되므로, 소고구려는 물론이고 최소한 8세기 중반까지 발해가 요동을 차지했다는 견해는 부정적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714년 안동도호부가 평주로 이동한 이후로 당이 사실상 요동을 포기하였다는 전제하에, 727년 당을 방문한 발해 사신 '대창발가'가 '양평현 개국남'에 책봉되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발해가 양평현(요양)을 차지했다고 보는 견해 역시 따르기 어렵다. 더구나 이런 논리대로라면 당이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책봉한 사실 역시 발해가 이미 발해만까지 진출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732-733년에 발해가 당의 등주와 마도산을 공격할 당시  이미 요동을 차지하였다는 견해도 따르기 어렵다. 등주 공격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되었듯이, 발해가 요동을 차지하였다면 곧바로 영주와 평주, 즉 요서로 공격하였을 텐데, 굳이 해로를 취한 것은 요동을 발해가 차지하지 않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대한 반론으로 등주를 공격함과 동시에 마도산을 육로로 공격하였다는 점을 들지만, 마도산 공격은 등주 공격 이후이며 공격 방향 역시 해로를 취하였다는 점이다.

 

발해가 등주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이곳이 당의 해상 방면의 전진 기지였기 때문이다. 수.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나 당이 697년 이진충의 난을 진압할 때도 수군은 등주에서 출발하여 요동반도로 직공하였다. 따라서 발해와 당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발해가 등주를 선제 공격하였던 것은 당의 공격이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전략적 판단에서 니왔던 것이다. 또한 734년 당이 등주의 군사기지인 평해군을 바닷가로 이동시킨 것도 발해의 공격로가 해로였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처럼 발해와 당 사이에 해상에서 긴장이 계속되는 상황은 역으로 당시 양국간에 영토가 맞닿아 있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발해가 등주를 공격하기 위해서 요동반도 남단에 해상 거점이나 기지를 두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한 걸음 물러나 이때 요동이 발해의 영역이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9세기 발해의 지방행정 구역에서 요동 지역에 비정되는 부와 주의 명칭이 없다는 점, 거란의 요동 공격에 대해 발해가 특별한 대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전자에 대한 유일한 가설이 안원부와 회원부를 요동 지역에 비정한 견해이다.

 

이 견해는 발해 동쪽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월희말갈 지역에 설치된 '안원(遠)부'가 신당서의 다른 판본, 즉 '급고각본'에서는 '안원(元)부'로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여, 이때의 원(元)은 원래 고구려 중심 지역의 하나인 요동지역을 가리킨다고 파악하였다. 이후 북한의 공식적인 견해는 안원부를 요양 부근, 그에 인접한 회원부를 길림성 회덕현(지금의 공주령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회원부와 안원부의 위치 비정은 발해가 요동을 차지했다는 전제하에 나온 추론이다. 따라서 앞에서 검토하였듯이 요사 지리지를 비롯한 후대의 기록들을 신뢰할 수 없으므로, 논외로 한다.

 

발해사에서 요동문제는 좁게는 발해의 대당관계를 포함하여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논의의 진전이 어려웠다. 그런데 발해의 요동영역설은 안동도호부의 퇴각과 발해의 세력 확장이라는 상황론에서 나온 것인데, 여기에는 요동이 당의 영역이 아니라면 발해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셈이다. 즉 근대 초기의 연구에서 요동을 무주(無主,주인이 없는 것) 지역이나 변경 지역으로 파악한 것과 달리 발해의 요동영역설은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선 개념을 그대로 이 시기에 투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